영수와 0수
주말에 만난 친구는 그녀의 직장 동료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이상해졌다며 걱정을 했다. 며칠 째 집에서 입던 옷에 머리도 감지 않은 모습으로 출근하며 회의 중에 딴소리를 하고 자신의 병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부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모습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친구는 같은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데 일을 떠맡게 된 부담과 함께 그 동료를 보며 두려움과 안도를 느낀 것 같았다. 그 동료는 중년의 미혼 여성으로 병든 아버지를 오롯이 봉양하고 있으며 앞가림 못하는 언니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을 뒷바라지해오다 자신의 인생이 절벽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짚푸라기가 되어 주는 것은 없고 억울한 마음만 가득했을 수도 있다. 친구는 그 동료가 삶의 의지를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친구는 싱글맘인데, 자식이 있다는 것이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얘기하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삶을 놓지 않을 안전망이 되어 줄 것이라며 안도했다. 아이가 나를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내가 이 아이를 지켜야 하고 상처 주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신을 살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최근 의도치 않게 삶의 의미와 관련된 책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 현재 읽고 있는 크리스 나이바우어의 <뇌는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도 그런데 직전에 읽은 김영탁의 <영수와 0수>도 그랬다.
<영수와 0수>는 AI가 발달하고 바이러스가 창궐한 미래에 인간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면 가족들과 격리되어 다른 지역에 살게 된다. 그러면서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하는 인간들이 많아지자 국가는 의무 노동을 시키고 가족 중에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면 남은 가족이 자살한 가족의 의무를 책임지는 연좌제가 부활하게 된다. 매일 어떻게 죽을지만 생각하는 영수는 자신이 자살하게 되면 가족들이 자신의 노동을 책임져 주 7일씩 일해야하기에 도저히 죽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러다 떠오른 묘안이 몰래 복제인간을 만들어 자기 대신 살게 하고 자신은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제 인간 0수는 자신보다 더 대담하게 자살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고 발버둥 치고 영수는 0수가 자살하고 싶지 않게 만들기 위해 모험을 시작하며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 소설은 <곰탕>을 쓴 김영탁 작가가 번아웃을 겪으며 너무 죽고 싶은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고민하던 때 갑자기 떠오른 소설이라고 했다. "보청기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는 울 엄마. 아빠도 없는데 나도 없으면, 아 그건 좀 아닌가?" 어머님 장수하시라고 어디 가든 빌던 작가에게 현타가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자꾸 죽고 싶은 생각이 멈추질 않으니 내가 사라져도 대타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했다.
소설에서 가족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민폐 끼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을 포함한 타인은 죽음으로 향하는 문에 완벽한 자물쇠가 되어 주지도 못한다. 인간은 태어나길 그렇게 이타적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 속도를 늦출 방지턱은 되겠으나 결국 자기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살고 싶은 것은 내 자식 내 가족 때문에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고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주말에 카페에서는 "맞아. 우리는 그래도 키워야 할 자식이 있잖아." 라며 자식이 마치 삶을 딱 잡아줄 만능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틀렸다. 심지어 그게 자식이든 부모든 그들이 나에게 '당신 때문에 산다.'라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중2인 아들은 엄마는 제발 어디 안 가냐고 레이저를 쏘고 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엄마로서 필요한 역할이 있었으나 지금은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제는 두어 시간을 들여 반찬을 만들었는데 학원에 갔다 온 아들이 계란 프라이와 스팸을 구워 딱 그것만 먹었다. 그런 아들 때문에 산다고 하면 내 인생은 매일이 좌절일 것이고 아들은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자식이 있던 없던 가족이 있던 없던 모두 자기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내가 나를 살리고, 내가 나를 죽인다. 그 책임은 살해가 아니고서야 오롯이 나의 선택이고 나의 책임이다.
작가는 책에서 마치 내 삶이 아닌 것처럼 여행자의 시선으로 내 삶을 살아보기를 권한다. 내가 잘하는 말 중에 '프레임에서 나와서 보기'가 있는데 다시 말하면 메타 포지션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뭐.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지만 해볼 만하다.
2월부터 일을 늘렸다. 이제부터 나는 주 5일 근무자다!
지금은 그게 나를 더 괜찮게 살게 만드는 방법이다.
내가 우울했던 이유와 내가 채우고 싶은 욕구 중에 얄팍하게 숨겨둔 인정의 욕구가 있었다. 남들보다 크진 않지만 일정 수준을 채우지 않으면 빨간불이 들어온다. 현모양처로 그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었으나 현모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친 지금 다른 것으로라도 재빨리 채워야 안정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 초에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도 빛을 잃고 연말에는 그나마 일에서 느꼈던 자부심마저 들기 힘들 정도로 일이 줄어 휘청였다. 다시 나를 재정비할 때다.
다른 동네의 정신건강의학과에 상담사로 취직해서 투잡을 뛰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시간당 페이가 이제까지 받던 금액보다 무려 20~25% 낮은 데다 통근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일반 버스가 아니라 무려 광역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탔을 때 2700원이었는데 새로 타보니 무려 3200원이었다! 왕복 6400원! 버스가 자주 안 와서 버스회사에 배차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K패스도 신청했다. 임금은 낮아졌는데 시간과 돈은 더 많이 써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지만 긍정적인 면은 상담 사례가 많다는 것이었다. 내담자가 언제나 오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면 상담 본연의 목적이 아닌 사심과 외부 압력이 자꾸 들어간다. 사례를 길게 이어가길, 심리검사를 많이 시키길 바라는 센터의 압박에 나 역시 내담자의 눈치를 안 보려고 해도 보게 된다. 난 그런 생각 없이 내가 옳다고 믿는 내 방식의 상담으로 기계처럼 일하고 싶다. 남편은 악조건에도 그냥 일이 더 하고 싶다는 나를 썩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내가 일하러 가면 자신이 자유라는 사실에 내심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2년간 남편의 주 3일 휴무가 평범하게 놓칠 수 없는 연차인 것처럼 매주 지치지 않고 특별한 데이트를 계획했었지만 쉬어갈 타이밍인 것 같다. 남편의 소원 대로 그를 집에 혼자 두는 호사도 제공해주고 싶다^^
문제가 생기면 정면돌파다. 해보고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마누라는 그만 일하러 갈게~
그래도 당신의 목요일은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