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남아야 하지?

by Lali Whale

겨울과 함께 왔던 우울감이 슬슬 묽어지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그렇지만 정확히는 아들의 학교 문제가 마무리되면서 나는 점점 내 페이스를 찾아가고 있다.


왜 사는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것은 단연 우울의 증상이 맞았다.

마음의 둑에 미세한 균열이 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는 이유 없이 화가 났고 슬펐다. 더 갔다가는 큰 일 나겠네 싶던 때, 다행히 비가 그쳤다. 기분이 나아짐과 동시에 삶의 의미를 쫓는 숨바꼭질이 멈추었다.


그 기간동안 할 일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책을 읽었다.

엘레나 피렌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밀라노 4부작을 다 읽었고, 클라우디아 피네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와 <신을 죽인 여자들>을 읽었다.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었다. 지난주에 문유석의 <나로 살 결심>을 읽으면서 책에 언급된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오랫동안 밀리에 담아두었던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었다. 사이사이 세계의 여러 단편집을 읽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 4부작은 성난 파도 같던 12월에 피신처가 되어준 감사한 책이었다. 너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언젠가 정리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은 삶을 낙관하고 어떤 책은 자신도 그 방향을 모르고 어떤 글은 비관했다. 그중에서 김연수와 김주혜의 책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했다.

"해도 안 되는 일, 질 게 뻔한 일을 왜 하고 있어?"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 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
"세컨드 윈드"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 난주의 바다 앞에서 (p.60)

위의 내용은 살짝 대화문으로 편집한 거다. 세컨드 윈드는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라고 나온다.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 진주의 결말 (p. 97)


김연수는 그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삶을 낙관하라고 말했다. 이 삶에 감사하고 타인에게 다정하라고 어둠과 빛이 있으면 빛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방향을 잃었을 때는 공허한 외침 같은 낙관이지만, 그 메시지가 너무 단호하니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난 한때 사랑했거나 아꼈던 모든 사람을 잃었어. 이제 내겐 싸워서 지킬 것도 없어."
"아. 그런 건 상관없어.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그게 바로 관건이라 말이야."
(중략)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왜 내가 살아남아야 하지?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무너져 내리면서 매일 같이 더 사악하고 어두운 곳이 되어가고. 나한테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넌 다른 사람에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군"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돈이 없어 기생이 되었던 옥희와 잔혹한 일본의 사업가 이토와의 대화다. 조선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떠난 이토도 옥희를 이용하기만 한 한철도 단이를 취하기만 한 성수도 진정 피도 눈물도 없는 야수다. 옥희와 옥희를 사랑했던 정호, 그리고 명수는 전래동화 속 호랑이 형님과 같은 야수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옥희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삶에 대한 소신을 얘기하고 있다.


"빌어먹을 전쟁 따위도, 외로움 같은 것도, 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계속 살아남아."


옥희에게 이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짜증 나는데 난 옥희보다 이토 같은 야수의 삶의 방식이 더 공감이 갔다.


삶의 의미 따위는 없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살아내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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