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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r 10. 2020

잘난 자들의 사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나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태생이 꼬여 있었다. 근원은 모르겠다만 되도않은 잘난척을 잠자코 듣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언론사에 입사했고 내 심성은 더욱 더 꼬였다. 내가 여유가 있고 마음이 부자면 참겠지만 내 삶이 너무나 빈곤하여 당신들의 "나 좀 칭찬해줘" 드립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지난해 지인 결혼식에서 모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만났다. 대기업 치곤 돈을 적게 주기로 유명한 회사였는데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회장 직속 팀에 들어갔다고 자랑을 했다. 본인이 무슨 안을 냈는데 그게 채택되서 회사 정책으로 실행됐고 표창을 받았다고 했다. 아니 솔직히 대리 나부랭이에게서 무슨 스티브잡스 급 아이디어가 나오겠나. 그걸 회사가 곧이곧대로 받아줄리도 만무한데 뻥을 너무 간드러치게 쳤다. 후배로 보이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멋져요" 했다. 속으로는 "아 이 관심종자 좀 꺼졌으면" 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등을 돌려 내게 "기자 너무 박봉 아니에요? 요새 기레기라고 욕도 많이 먹을텐데 힘드시겠어요." 이건 잘난척을 넘어서 숫제 공격이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지금 다니시는 기업보단 많이 받을 거 같아요. 거기 A 전무님 잘계세요? 저랑 엄청 친한데 한번 여쭤봐야겠네요. 본인이 내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뭔지 너무 궁금하네요"했다. 어방이 벙벙해진 그를 뒤로하고 유유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A 전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막 던진 거였다. 자랑충때문에 휴일 기분을 잡쳐서 사우나 가서 심신을 다스렸던 기억이 난다.


난 일부 택시기사의 거짓된 자랑도 참지 못한다. 택시를 타면 모든 기사의 아들딸이 판검사요 의사요 명문대 출신 대기업 직장인이다. 본인은 공직 혹은 대기업에 근무하다 퇴직해서 취미로 택시를 한단다. 그들은 내 직업과 출신학교, 결혼 여부를 묻고는 이리저리 훈수를 둔다. 이때다! "아드님 연세가 저랑 비슷한데 어떻게 되세요?" 대충 비슷하게 나이를 둘러대고 '엇! 저도 그 학교 그 과 나왔는데. 아드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한다. 그러면 갑자기 기사가 우물쭈물한다. 또 어느 부처 공직자였는지 묻는다. 우리 아버지도 거기 계셨다고 거짓말로 응수한다. 갑자기 그들은 또 말을 더듬는다. 그 이후부터는 아주 조용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자랑하는 것도 듣기 힘든데 거짓말까지 참기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애 혹은 결혼, 자녀 자랑은 인류의 스테디셀러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라 더 그럴순 있겠지만 너무 심한 경우가 많다. 하루가 다르게 카톡방에 애기 사진을 올리는데 처음 한두번은 "너무 예쁘다" "아유 엄마 닮아서 예쁘네(무조건 지인이 아니고 지인의 배우자를 닮았다고 하면서 칭찬한다)" 하는데 수십번 반복되면 슬슬 짜증이 난다. 사진을 올리는 의도가 칭찬해달라고 하는건데 솔직히 인간적으로 애기가 하나도 안 예쁘게 생겼는데 거짓말을 짜내기도 힘들다. 남친 여친, 남편 부인 자랑도 비슷한데 어차피 비슷한 부류끼리 지지고 볶고 사는데 "너 닮은 애 만났으면 할말 다했지" 하고 싶지만 "아유 천생연분이네" "한국의 브란젤리나네" "너무 부럽다. 너처럼 행복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유 너도 좋은 사람 만날거야" 하면서 웃는다. ^^ 초록은 동색^^


아니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못했지만 요새 결혼은 선택인 시대인데 "결혼하니까 너무 좋아. 너도 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되도 않은 오지랖인가. 진짜 행복하고 즐거운 커플과 부부는 남의 인생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연애와 결혼을 권유하는 사람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상 좀 주댕이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아들이랑 싸워서 한마디도 안하고, 아내는 바람피고, 집에 들어가도 강아지조차 반겨주지 않는 치들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 사회에서 본인의 지위 등을 이용해 행복한 척 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봐왔다. 딱 봐도 불행해보이는데 행복한 척 하는 모습이 일견 측은하기도 하면서 이해도 됐다. 그들은 행복한 척 하나로 사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본인의 불행을 들키면, 삶을 포기해버려야 하는 지경이다.


중년 남녀는 친구 혹은 지인끼리 만나면 할 얘기가 없는 듯하다. 본인이 컨텐츠가 없으니 자식 자랑 배틀에 돌입한다. 영혼까지 긁어서 자식의 애인, 학교, 직장, 연봉을 늘어놓는다. 참 신기하다. 하버드 졸업 후 국제 변호사를 하거나 골드만삭스에 다니거나 구글에 다니거나 하지 않는 이상 우리네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근데도 귀신같이 자랑거리를 발견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그 처절한 지옥도가 너무나 한심해보이고, 시간낭비 같은 것이다. 그 시간에 자식 자랑 보다는 본인들이 늙어가며 배웠던 삶의 지혜를 나누기도 벅찰 터인데.  


차 자랑, 응 카푸어. 집 자랑, 응 하우스 푸어(아 근데 집은 좀 부럽긴하다...). 강아지 자랑, 응 반려인 인구 1000만. 다이어트 자랑, 아니 이게 뺀 몸이라고. 빼기 전엔 도대체 얼마나 거대했던 거야.. 시계 자랑, 응 워치푸어. 가방 자랑, 36개월 할부로 끊었니. 숱 많다고 자랑, 아 이것도 좀 부럽다.. 눈썹 문신 잘됐다고 자랑, 응 짱구. 책 냈다고 자랑, 진짜 책 같지도 않은 책. 나무와 종이에게 미안한 책이 천지삐까리다. 작가 됐다고 자랑, 쓰신 책을 찬찬히 뒤져가며 반추해보자. 작가 칭호 운운하기 부끄럽진 않은지. 진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온갖 것을 가지고 자랑질을 해댄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회가 오면서 대놓고 하는 잘난척보다 은은한 잘난척(은잘)도 횡행한다. 난 맘까페 취재 도중 이런 '은잘' 행태를 많이 봤다. 맘까페는 정말 위험한 정글 같은 곳인데, A맘 B맘 들이 서로를 존대하며 육아 정보를 공유하는 품위있는 공간으로 위장해있다. 실상은 아들 자랑 남편 자랑 집 자랑 음식솜씨 자랑 시댁 자랑 다이어트 자랑이 뒤섞인 복마전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대놓고 자랑하지 않는다. 이런식이다. 우리 아들 시력이 요새 많이 안좋아졌어요, 애기들 눈에 좋은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댓글이 달리고 "아니 왜 갑자기 시력이 그렇게 됐어요" 하면 요새 책에 푹 빠져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아들 자랑을 주렁주렁 단다. 거의 답정 수준인데 그러면 또 책 종류를 묻거나 아들교육 비법을 묻는 댓글도 달린다.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한번 빠지고 두번 전진하는 이 고차원의 잘난척 세계란..


정말 잘난 사람은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특성상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모두가 바라지만 고수들은 참고 인내한다. 하수처럼 나좀 봐달라고 발악하지 않는다. 겸손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긴다.


국민대 표성수 교수


2015년 당시 국민대 법대 학장이었던 표성수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억이 아주 생생한 것은 표 교수님 같은 분을 처음봤기 때문이다. 그는 6형제 중 셋째로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 때였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 공부를 위해 ‘무리해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온 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과외를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비는 과외로 충당했다. 고단함에 폐결핵까지 왔지만 하루 10∼12시간씩 꾸준히 책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해서 준비한 지 1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생활을 접은 뒤 2005년부터 국민대 법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사시 합격 후 검사까지 하고 교수인 사람인데도 그는 너무나 겸손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했는데도 자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빛내는 기사보다 국민대 법대를 위한 기사를 써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물론 그의 속마음은 모르겠다. 다만 한참 어린 기자를 대하는 진중한 태도와 한마디 한마디의 진정성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그와 인터뷰한 한시간 남짓은 아직도 기억나는 향기로은 시간이었다. 정말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도 사람인데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내가 만난 수많은 공무원과 공직자, 정치인과 판검사, 의사들 대부분은 표 교수님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교수님의 향기가 살갑게 다가왔다.


사실 나도 말은 이렇게 했어도 은연중에 잘난척을 많이 한 것 같다. 기자라는 거 빼고는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 나라서, 너무나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갑질도 하고 했었다(밑에 글 보니 내가 한 단독기사 자랑을 해놨네요...) 사실 변명이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냥 내가 하고싶은거 하면서 즐겁게 자존감있게 살아 가기 위해 표 교수님같은 내공을 더 열심히 쌓아야지. 그러니 저나 여러분 모두 잘난척도 좀 센스있게, 고수답게 지능적으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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