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성별이나 연령, 직업군을 욕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영숙(38)에게 소개팅(이라 쓰고 사실상 맞선) 제의가 들어온 것은 추석 연휴 전날 오후였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을 맡은 영숙은 학생들에게 "추석 때 어디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때 짖궂은 한 녀석이 물었다. "선생님은 결혼을 안 했는데, 그럼 혼자 노시는 건가요" 깔깔깔깔 까르르, 불쌍해요! 심심할 것 같아요! 난리 부르스가 펼쳐졌다. 영숙은 애써 웃었지만 이 잼민이들의 죽빵을 한대씩 갈기고픈 심정이었다. "선생님도 부모님이 있어요. 부모님 댁에서 송편도 빚고 할 거에요." 대답하는 영숙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왜 내가 이 애새끼들한테 변명을 하고 있지? 전자담배 한 모금이 급히 땡겼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자 옆반 담임이 영숙에게 다가왔다. "언니 혹시 소개팅 할래?" 영숙은 순간 귀가 번쩍 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누군데?" "아 예전에 내가 한번 얘기한 사람. 우리 남편 직장 동료야." "아 그럼 현대차?" "응응. 현대차 엔지니어." "나이는?" "나이가 좀 있긴해. 43살인데. 근데 누가봐도 40대로 안보이고 30대로 보여. 학교는 Y대 나왔고 키는 173 정도. 크진 않는데 비율이 좋대. 헬스를 몇년 했던 모양이야. 골프도 잘 친대."
동료 교사는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누가봐도 40대 중반, 아니 심하게는 50살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웃고 있었다. 메종키츠네 셔츠에 린드버그 안경, 고야드 클러치를 들고 벤츠 E클래스 앞에서 브이를 그려보인 남성은 중년의 향기를 강하게 풍겼다. 목주름이 많았고 약간 살찐 전현무를 닮았다. 하지만 전현무보다 눈이 작고 입이 옹졸했다.
"언니 그리고 이 오빠 오목교에 집이 있다지 뭐야. 정확히는 몰라도 10억 후반대일걸 요새 시세가." 오목교!! 연신내에 자취중인 영숙은 목동 거주가 꿈이었다. 아이를낳고 목동 맘들의 그 드센 텃세를 겪으며 좌절하다 결국에는 그 동네를 휘어잡는 현대판 스카이캐슬의 주인공을 꿈꿨다. 영숙은 "나쁘지 않는 조건이네"라고 혼자 되뇌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근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대?" "원래 이 오빠가 결혼 생각이 없었대. 평생 한 여자랑 어떻게 사느냐는 주의였는데 이제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거야. 어머니가 몸이 안좋으시고 해서 자식을 낳아서 효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대. 그런데 또 집안에서 원하는 게 교사라는 거야. 어때 괜찮지 않아?" 영숙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뭐 한번 만나나 보지 뭐." "우와 언니 잘 생각했어. 잘 되면 한턱 쏘는 거다?"
퇴근 직후 영숙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부터 재정비했다. 좀더 뽀샤시한 필터를 적용한 뒤 다시 업로드했다. 그날 저녁, 소개팅남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처음뵙겠습니다. 소개받은 XXX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영숙이라고 해요" "추석 명절 지나고 한번 식사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좋으실까요?" 영숙은 그주 주말에 바로 시간이 됐지만 일부러 2주 후를 불렀다. 남자는 되물었다. "혹시 한식 양식 태국음식 중에서 뭐가 좋으십니까?" 다 좋았지만 영숙은 태국음식을 골랐다. 어딘가 모르게 MZ스럽고, 힙해 보였기 때문이다. 파스타는 이제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럼 제가 좋은 곳을 물색한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소개팅남의 카톡에는 아무 사진도 없었다. 파란색 기본 화면이었다. 영숙은 구글에서 소개팅남을 검색해봤다. 이름만도 해보고, 현대차 XXX로도 해봤다.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정성이었으면 그냥 국정원에서 일할걸, 하며 영숙은 혼자 호호호 웃어버렸다.
영숙은 이 소개팅 덕에 명절을 잘 이겨냈다. 일년에 딱 2번, 설과 추석에만 보는 친척들은 처음에만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영숙을 걱정하는 것으로 2박 3일을 보냈다. 아휴 너 그렇게 살이 쪄서 어떻게 시집을 가겠니, 성형이라도 해봐야 하는것 아니니, 교사면 남자들이 줄을 스는 것 아니니, 너무 눈이 높은 것 아니니, 옆집 누구는 벌써 시집가서 애가 둘이라더라, 라는 뻔하디 뻔한 레파토리가 이어졌다. 그런 워딩 하나하나는 뻔하지만 침투력이 엄청나서 영숙은 계속 무시하려 하다가도 생각이 났다. 다음 설에는 제대로 된 남자 하나 꼭 소개시키리라, 별거 아닌 남자나 여자와 살면서 으스대는 네년놈들의 입을 닥치게 하리라, 다짐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재수를 거쳐 교대에 합격한 영숙은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릴 줄 알았다. 선생님하면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지 않은가. 교대를 졸업하고 임고를 거쳐 서울 종로의 한 초등학교에 배치됐을 때 그녀의 나이 27세였다. 미칠듯한 소개팅 행렬이 이어졌다. 의사부터 대기업 직원,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변리사, 보험계리사 들의 구애가 쏟아졌다. 토일요일은 무조건 소개팅을 뛰었다. 하루에 두탕을 뛴 적도 있었다. 영숙은 그다지 예쁜 외모는 아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 영숙이 애프터 신청을 거절했다. 직업이 괜찮으면 외모가 좀 별로 였고, 가부장적인 모습이 엿보인다거나 마마보이 같은 느낌이 들면 무조건 깠다. 어차피 또 다른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별로 위기감이 없었다. 그러다 나이가 30을 넘겼고, 35살도 지났다. 그중에 좋은 사람, 따뜻한 남자,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 지경이 됐다. 영숙은 요새들어선 자신이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10년 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고 인생을 살아야할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도도한 척 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영숙과 소개팅남은 서울 연남동의 한 태국음식점에서 만났다. 영숙은 샤넬 백과 마놀로블라닉 구두를 착용했다. 무려 4년만의 소개팅이라 청담동 코코미카에서 헤어와 메이크업도 받았다. 디자이너 쌤이 오늘 어디 가세요? 해서 영숙은 자신도 모르게 "애들 돌잔치요" 라고 했다. 택시를 타서 거울을 보니 오늘 좀 자신이 예뻐보였다. 뭐 김태희 급은 안되어도 김선아(현재 말고 삼순이 드라마 시절) 급은 된다고 생각했다.
10분전 약속장소에 도착한 영숙은 일부러 화장실에서 시간을 끌다가 약속 시간을 1분 넘긴 시간에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또각또각 걸어가는데 100m 앞에 누가 봐도 산적 포스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영숙씨죠? 반갑습니다." 영숙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예 반갑습니다." 영숙은 눈을 들어 남성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사진보다 훨씬 어두운 피부와 잡티, 탈모 직전의 머리가 눈에 띄었다. 사진 속 남성의 머리숱은 아마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 같았다. 휴, 그냥 밥이나 먹자 하는데 갑자기 남성이 말했다. "영숙씨는 실물이 사진과 많이 다르시네요." 파박, 영숙의 눈에 살기가 생겼다. "어떻게 다른가요?" "아 뭔가 사진은 좀더 어려보이셨는데 실물은 저랑 좀 비슷하신 듯 해서.." 영숙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야이 새끼야, 샤넬백으로 맞아봤니? 널 때리면 샤넬백에 기름낄 것 같아서 참는다.'
이후 이어진 소개팅은 지옥과도 같았다. 남성은 갑자기 최근 있었던 교사들의 자살과 학부모의 갑질, 이어진 시위 등을 계속 언급했다. 그러면서 학부모도 문제지만 교사들도 제대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숙은 좋게 좋게 넘기려 했으나 결국 소개팅남과 대판 싸우고 말았다. 이미 소개팅남은 자신이 현대차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수십분간 떠든 뒤였다. 영숙이 여행 얘기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이 남성은 막무가내였다. 1시간여를 버틴 영숙은 "아 죄송하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남성은 "예 저도 1시간 예의상 버텼습니다. 돈은 제가 낼테니 남은 거 편하게 먹고 가십쇼"하면서 입구로 뛰어가버렸다. 나시고랭과 미고랭, 똠양꿍 사이에서 영숙은 혼자가 되어 버렸다.
음식점을 나온 영숙은 시원하게 전자담배를 한입 빨았다. '참 개같은 날의 오후네'하고 생각했다. 오늘 행사를 위해 들인 돈이 너무 아까웠다. 이미 엄마와 동료 교사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영숙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여기가 연남동이지? 핫 가이가 많겠네" 했다.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앱 들을 키기 시작했다. 틴더와 범블, 힌지, 정오의데이트, 썸데이 등 5개의 소개팅 앱을 그녀는 번개처럼 오고갔다. 평소에 그녀가 즐겨하는 앱이었다. 틴더가 울리고 한 남성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25살인데 그쪽은 몇살이에요?" 영숙은 "응? 누나 딱 서른"이라고 답했다. "나 지금 홍대인데 잠깐 술이나 마실래요?" 영숙은 바로 택시를 잡았다.
그들은 함께 삼겹살을 먹었다. "누나 근데 옷을 이렇게 잘 입은 거 보니까 결혼식 갔다와요? 혹시 결혼한거 아니에요?" "응 아니야 그냥 어디좀 다녀왔어" 각자 소맥이 10잔 쯤 들어가자 영숙은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나 사실 오늘 소개팅했어. 근데 어디서 지상렬 같이 생긴 새끼가 나를 무시한 거 있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난리 부르스야!!!" "아니 이렇게 예쁜 누나를 두고 미친 거 아니에요. 그새끼 만나면 내가 진짜 흠씬 패줄게요." 술은 계속 들어갔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근처 모텔로 향했다.
남자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제서야 영숙은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몸을 빼려고 했는데, 남자가 갑자기 입을 포개왔다. 수년만의 키스가 싫지 않은 영숙이었다. 갑자기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뭐하는 거야?" "누나 이거 해봤어요?" 남자가 꺼낸 것은 대마초였다. 영숙은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30대 여교사, 모텔에서 외간남자와 마약하다 적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냐 나는 안할게. 어디서 구한거야 도대체" "외국인 친구가 줬어요. 요새 20대 들은 다 해요. 일단 나 하는거 일단 잘 봐요." 그는 대마초를 돌돌 말더니 한입 피워 물었다. 담배도 아닌 것이, 매캐하고 몽롱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남자의 동공이 풀리고 갑자기 침대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야야, 괜찮아?" 갑자기 남성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르르부르르 떨더니 축 하고 늘어졌다.
영숙은 남자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기척이 없었다. "아 설마 죽은거 아니야? 그러니까 마약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놈이 무슨 쎈척을 하고 난리야" 영숙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할까? 그러면 조사 과정에서 내 신분이 드러날텐데, 드라마 '더글로리' 대사처럼 얼마나 좁은게 이 바닥인데.. 아오, 이게 다 그놈의 망할 소개팅 때문이야. 영숙은 미친듯이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주민등록증이 떨어졌다. 이새끼, 25살이라더니 32살이었잖아. 주머니에선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성의 사진도 나왔다. 지이이잉~~ 그순간 남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 사랑'이라고 적힌 번호였다. 영숙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혹시 지훈 오빠 휴대폰 아니에요?" 영숙은 울부짖었다. "니네 오빠 지금 죽게 생겼어. 빨리 이 모텔로 튀어와. 705호야."
전화를 끊은 영숙은 황급히 옷을 입었다.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잡았다. 엘레베이터는 각 층에서 다 멈췄다. 술에 취했거나 취하지 않았거나. 연인이거나 원나잇이거나. 남녀 거나 혹은 남이나 여 동성이거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텔에 와서 각층 각방으로 흩어졌다. 도망치듯이 모텔을 나온 영숙은 가방을 뒤졌다. 아무래도 전자담배를 방에 놓고 나온 모양이었다. 구 홍대 놀이터 근처 공터에 걸터앉은 영숙은 밤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현모양처가 되기도, 그렇다고 모든 걸 내려놓고 방탕하게 놀기도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쿨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런 자신의 삶, 앞으로도 그러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영숙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