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국면에서 떠오르는 이청준
나는 때아닌 6시간 계엄 천하를 목도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검사가 한 국가의 리더가 되면, 그 나라가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목격했다. 범인을 심문하고, 법을 따져 기소하고, 잡아넣던 그 습관을, 법조인 물을 빼지 못한 법조인이 정치를 절대 하면 안 되는 이유도 배웠다.
그리고 법의 중요성과 말도 안 되는 윗선의 명령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 공무원과 군인들의 고뇌도 먼발치에서나마 체감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황당무계한 21세기 계엄 사태는 결국 여소야대 국면에서 제대로 야당과 소통하려 하지도 않고 몽니를 부리던 윤석열의 마지막 발악이자, 탄핵 정국을 앞당기는 해프닝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새삼스러운 계기도 됐다. 지난 3일 밤 계엄사령관이 뿌렸다는 문자에는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실제로 우리 편집국에 총구를 겨눈 군인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문득 공포를 느꼈다. 내가 맨날 쓰던 정부 비판 기사를 쓰지 못하고, 5공 시절 땡전 뉴스만 보도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SNS가 보편화되고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싶으면서도 국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무장군인들을 보고 순식간에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다. 정치력은 없고, 소통하는 방식도 모르는 그런 멍청한 리더가 평범한 우리의 삶을 곧바로 바꿀 수도 있다는 공포.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윤석열은 작금의 사태를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특정 정부 예산을 삭감하거나 일부 관료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는 민주당을 종북세력, 내란 세력으로 지칭했다. 예산안 가지고 여야가 싸우는 것은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중점에 두는 가치나 이데올로기가 다른 탓이다. 물론 야당의 몽니 측면도 있겠지만.. 특정 관료에 대한 탄핵 추진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기싸움이다.
그럼 이런 국면을 타개하는 옳은 방법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이 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야당을 설득하는 것이다. 여소야대는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만든 정치 지형이다. 여당이 못해서 국민들이 야당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은 민주당이 내놓은 정책이나 행동을 '국가 전복 행위' 등으로 보는 것은 국민들을 기만하는 일이다.
나는 국방부장관과 공모해 계엄령을 발령한 윤석열의 행동에서 '나 이렇게 잘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훼방을 놓는 거야!' 하는 유아틱 한 마인드가 읽힌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법에 충성한다면서 정의로운 검사 이미지로 한 번에 대통령까지 된 정치신인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양새가 퍽 안타까우면서도, 앞으로는 정치를 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아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9수 끝에 법조인이 된 윤석열이 그 이후 쭉 엘리트적 삶을 살면서 남을 이해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온 것이 결국 황당무계 계엄 사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선후배 검사, 그놈의 충암고 인맥만 돌리면서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살다가 결국 시대가 허락하는 해법은 외면하고 스스로 늪을 파고 관을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못까지 박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우리 국민 모두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네 정치 지형이 또 한 번 이렇게 퇴보하는 것 같아 짜증 난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 우리 정치가 저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또 다른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의 딸로서 정치를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중심을 못 잡고 비선실세에게 흔들리던 사람이 있다. 또 와이프 문제를 두고 쩔쩔매며 자신이 쌓아온 사회적 성과를 까먹다 못해 불로 태워버린 이가 있다. 다이내믹 대한민국이란 말이 또 한 번 사실로 확인됐지만, 불쾌하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좀 제대로 된 대통령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권이 구려서 새로운 인물을 데려왔더니 더 구리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을 어디서 찾아서 대통령실에 세워야 할 것인가. 너무나 어려운 문제다.
난 이번에 윤석열을 보면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떠올렸다. 조백헌 대령과 윤석열은 좀 닮은 구석이 있다. 모르는 이를 위해 소설을 좀 요약해 보겠다.
당신들의 천국은 한센병 환자들이 모이는 소록도에 새로운 원장이 부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군인인 조백헌 대령은 소록도를 환자들의 낙원 혹은 천국으로 만들겠노라 공언했다. 유령들의 섬이었던 소록도에 활기를 불어넣고, 환자들이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낙원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5000명 주민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이 중에는 발병 후 완쾌한 이도 있고 한창 병이 진행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4대 원장이었던 주정수 씨를 떠올렸다. 주 원장도 조백헌 대령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섬 내 복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고 강조했다. 주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노역을 했고 여러 건물을 지었다. 다만 원장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다. 고된 노동은 계속됐고 자발적 동원을 넘어 노예와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공원을 꾸며놓고 외부 사람들만 이용하게 했다. 값비싼 식물들을 배치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주 원장은 분노한 환자들의 칼에 맞아 사망한다.
소설에서 계속 나오는 게 '동상' 이야기다. 주 원장 사망 전 섬 장로회에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자며 동상을 세웠는데 섬사람들은 이 동상에 대해 노이로제가 있다. 동상은 선의로 가장한 통치자의 야망과 욕망을 지칭한다.
처음 의도는 좋았다. 피지배자를 위한 헌신과 진심이 담겨있었다. 다만 통치자가 아무리 일반 국민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해도 100% 이해되는 게 아니다. 통치자가 구성하는 천국이 피지배자의 천국이 될 수가 없다.
조백헌 대령은 환자와 병원직원들이 끊임없이 동상을 언급하자 자신은 동상을 짓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섬 분위기가 너무 침체돼 있으니 새로운 방안을 찾겠다고 한다. 이후 축구팀을 조직하고 섬사람들이 열렬히 참여하자 간척사업 안을 제시한다. 바다를 막아 땅을 얻은 뒤 농사를 지어 섬과 뭍을 잇겠다는 구상이었다.
뭍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시작된다. 환자들의 노역으로 인해 돌로 쌓은 둑이 바다 위로 올라오는 듯싶더니 태풍으로 인해 이내 가라앉는다. 조백헌 대령은 환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결국 발령 명령을 받아 섬을 떠난다.
5년이 지나고 조백헌 대령은 다시 섬을 찾는다. 원장이 아니라 일반인의 신분으로 섬에서 생활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주정수 원장이 꿈꿨던 천국이 진짜 천국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청준은 소설에서 일방적인 정부주도의 개발독재를 중의적으로 비판했다. 천국을 누가, 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인 성찰을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헝그리정신을 바탕으로 잘 먹고 잘살자는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전후 낙후된 한국 사회를 재건하는데 분명 기여했다.
하지만 자신의 독재를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청산하고 개발이 민주보다 중요하다며 강권통치를 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품는 데는 실패했다. 당신들의 천국을 보면 편지 혹은 작중 인물 간의 대화 형식을 빌려 통치자의 천국을 비판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혹자는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하지만 그만큼 작가가 강조하고 싶던 부분이라서 이런 장치를 넣은 것으로 보인다.
당신들의 천국은 지금의 정치상황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은 민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가. 본인만의 정책을 대다수가 원한다고 착각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거나 불순분자로 치부하고 있진 않은가. 당신만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석열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위해서 내가 이런 것도 하겠다는데 감히 나의 발목을 잡아? 그럼 계엄을 통해 너희를 다 정리하고 찬성하는 세력을 모아 내가 꿈꾸는 나라를 만들겠어! 참 오만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다 이런 생각으로 반대파를 잡아가두고 민주주의를 난도질했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자신만의 정의다, 자신만이 옳다는 치들은 여전히 많고 그런 이에게 권력을 쥐어주면 수십 년 전의 악몽이 다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린 깨닫게 됐다. 지도자는 가끔 불도저 같이 무언가를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됐을 경우 민초의 삶이 박살 나고 나라가 흔들린다. 빨리 이 사태가 마무리되어야겠지만,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우리의 리더로 세워야 할 것인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곧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