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등학교에 기자 관련 강연을 간 적이 있다. 젊은 친구들이 열성적으로 질문을 하는데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신문은 망해가는 데 왜 신문을 택했느냐"부터 "왜 그 매체에 갔냐" "어떤 기사를 쓰셨느냐"고 날카로운 지적도 나왔다. 난 되물었다. "왜 여러분은 기자를 하고 싶나요" "어떤 기자가 되고 싶나요"라고 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사회에 한 줄기 빛이 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약자를 향한 기자가 좋은 기자"라고 했다. 한 마디 보탰다. "여러분이 말하는 약자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그 기준좀 알려달라"고 했다. 한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기자 생활을 하면 할 수록 더 어렵고 궁금하다. 삼라만상 중에 쉬운 건 하나도 없다. 별거 아닌 싸움같아 보여도 실상은 100% 선악이 없다. 이쪽 얘기를 들으면 이쪽이 맞고, 저쪽과 대화하면 저쪽도 맞다. 세상은 명쾌하지 않다. 애매하다. 그러니 약자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편의점 점주가 알바비를 떼먹었다고 제보가 왔다. 젊고 어린 여학생과 악랄한 점주의 대결처럼 보였다. 취재해보니 알바가 불성실하게 일했고, 점주가 "이런식으로 하면 돈을 못 준다"고 채근하자 여기저기에 자신의 억울함을 알린 거였다. 우리는 편견속에서 갑과 을을 쉽게 재단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난 수습들에게 얘기할 때도 "약자를 위한 기자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 정의감과 열정, 활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약자를 향하는 기자가 되는 순간 자신만의 틀과 사고에 갇혀 정확히 사안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까 두렵다.
한 때 세상을 바꿀 특종을 꿈꾸던 적이 있었다. TV조선과 한겨레, JTBC가 최순실 국정농단 특종을 하고 내 또래 젊은 기자들이 그에 기여했을 때 상대적 박탈감도 들었다. 굳이 매체의 차이가 아닐 터이지만, 나도 저런 세상을 움직이는 기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엔 생각이 달라졌다. 특종을 하고, 각종 기자상을 받고, 유명세를 떨치는 기자만이 좋은 기자는 아닐 것 같다. 기자마자 각자 강점이 있다. 특종을 하는 기자가 한 사안을 충분히 취재하도록 데일리한 현안을 뒤에서 대신 챙겨주는 역할을 하는 기자도 필요하다. 누구는 능력이 없고, 일을 열심히 안한다고 힐난할지 모른다. 그래도 난 그런 기자들도 충분히 좋은 기자라고 생각한다.
난 오히려 새로운 경험을 했다. 4년 전 선배와 함께 당시 국악중학교에 재학하던 박채원양의 사연을 보도했다. 채원이는 희귀병을 앓았지만 ‘병명’이 정확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는 편집회의를 거쳐 신문 1면에 실렸다. 다음 날 50통 넘는 전화를 받았다. 채원이를 돕고 싶다는 거였다.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4000만원이 모였다. “딸 키우는 엄마로서 마음이 아파요. 어서 일어나렴” “기적을 믿어요. 희망을 놓지 말고 힘내세요”라는 댓글 1500개가 달렸다.
신권혁 하사도 떠오른다. 2015년 8월 신 하사는 훈련 도중 M-14 대인지뢰를 밟았다. 우리 군이 매설한 지뢰였다. 당시 군 규정은 북한 지뢰를 밟으면 전상(戰傷), 아군 지뢰를 밟으면 공상(公傷)으로 처리해 치료비가 다르게 책정됐다. 신 하사의 가족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는데 차별받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보도 이후 한 가구업체는 “군인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신 하사에게 최신 가구 23종을 증정했다. 신 하사의 부사관학교 동기는 이메일을 보내 “같은 군인으로 가슴이 너무 아프다. 더 많이 알려 달라. 도와 달라”고 남겼다. 전역한 직업 군인인데, 신 하사의 사연이 눈에 밟혀 병원에 찾아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최순실 특종에 비해서는 전혀 크지 않은 기사들이다. 그래도 벅차오르는 게 있었다. 아무리 언론이 망해간다 해도 아직도 주목이 필요한 이들을 발굴하고 보도해서 부조리한 법과 제도를 바꾸는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취재할 때 이들을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는 피해자다. 감정적으로 빠지기 보다는 그들이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차원의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꼭 큰 기사가 아니라도 이런 소소한 것들부터라도 조금씩 세상을 살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준다는 믿음이 기자 생활을 이어가는 버팀목이 되는 것 같다.
붙임성이 좋아 취재를 잘하는 기자는 분명 좋은 기자다. 취재된 사안을 잘 정리해 쉽고 잘 전달되도록 기사를 쓰는 기자도 좋은 기자다. 난 회사를 위해서 광고를 열심히 따오는 기자도 좋은 기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협박 등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기획기사를 잘 발굴하는 기자도 있고, 출입처 내에서 단독을 물어오는 기자와 기사는 좀 못 쓰더라도 칼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알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자도 있다. 모두가 좋은 기자들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본인의 장점이 무엇인지 빨리 파악하는 거다. 다른 기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 부담과 책임을 조금 내려놓을 때 비로소 좋은 기자가 될 자질이 생기는 것 같다.
어차피 나는 리영희 선생이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보도해 세상을 바꾼 윤상삼 동아일보, 신성호 중앙일보 선배처럼 될 수도 없어 보인다. 큰 꿈을 안고 입사했지만 내 깜냥은 그 수준이 되지 못하는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많은 좌절과 고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하는 기자질이 적어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기자로서의 내 장점을 키워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기자는 되지 않겠다. 나만의 문체와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기사를 많이많이 쓰고 싶다. 그리고 좋은 기자들을 많이 보고 배우면서 그들만의 기자질을 필사하고 공부하며 오늘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기자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