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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Apr 21. 2023

애프터썬

마음을 나누는 일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이 힘든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는 열망대로 누군가와 힘든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추슬러갔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의 고통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만큼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힘든 마음을 터놓아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가 쉽지 않았죠. 그렇기에 스스로 일어서야만 했던 순간들이 무척이나 아쉽고 슬픕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또 함께 떠오르는 것이 나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나를 필요로 했던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자 했던 순간들 말이죠. 말하려 했지만 제가 듣지 않은 순간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애프터썬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타인의 고통을 뒤늦게 떠올리는 영화 말이죠.


소피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떠났던 여행을 떠올려보며 흐릿해져 버린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 떠올려보죠.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어린 소피는 종종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 남겼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영상들을 보고 있어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소피에게 아버지는 군데군데 상상을 오려 덧붙여야 하는 다소 흐릿한 청사진입니다. 소피는 그때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정말로 아버지를 바라보거나 듣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피는 사춘기였습니다. 사춘기는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는 시기죠. 아마 소피에게는 아버지와 노는 것보다 리조트에서 자신보다 좀 더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을 관찰하고 함께 노는 것이 더 즐거웠을 것입니다. 어른처럼 자신과 동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과는 다른, 어딘가 성숙한 구석이 있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니까요. 또한 그들이 자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스킨십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궁금하고, 경험해보고 싶어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소피에게 아버지는 크게 궁금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본인의 관심을 끄는 것들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도 없었을 것이고요. 그렇기에 소피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눈과 귀, 마음 그 어떤 것도 아버지를 향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아버지에 대해 그리 많은 단서를 주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소피가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고, 소피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단서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호한 단서들을 가지고도 우리는 쉽게 아버지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제는 어른이 된 소피도 알게 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피가 아버지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에는 듣지 않았던 소피의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숨어서, 제삼자인 우리의 눈에만 두드러지는 어딘가에서 신음합니다.


영화 속의 단서들에서 알 수 있는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소피를 낳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다소 무능력한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특히 소피와 외할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나누는 대화에서 이런 무능력함으로 인해 불편해진 사이가 두드러집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소피를 사랑하지만, 함께할 수는 없는 외로운 처지였던 것이죠. 그런 가족들에게는 더욱 본인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고, 그저 어두운 마음속에서 땀 흘리며 춤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고통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대가 그걸 원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먼저 자신의 고통을 알아채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소피가 자신의 고통을 알아채고 먼저 이야기를 건네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어두운 곳에서 땀 흘려 추는 춤을 멈추고 안아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방 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잠에 취한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누군가 자신을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아이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소피는 그런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줄 만큼 어른스러워졌지만, 그런 마음을 헤아릴 만큼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누군가와 교감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은 사실 간단합니다. 그것이 고통이든, 행복이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또 있는 그대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말하기를 주저하고, 듣기를 주저하며 살고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속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있을지 끊임없이 불안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나눠야 할 때에 너무 늦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피는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만 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어둡고 시끄러운 마음속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소피는 아버지의 어두운 마음에 제때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소피처럼 늦지 않기 위해 우리는 들어야 할 때에 귀를 열려고 노력하고, 말해야 할 때에 입을 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같은 해를 보면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은 어두운 밤에는 고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둡고 지독한 고독이 찾아오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우리는 도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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