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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Sep 19. 2023

2023/09/19

짧은 글 연습

  비 오는 날의 아스팔트에는 마아가린 냄새가 난다. 누군가는 그것이 미생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흙내음이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석유의 휘발성 냄새라고도 했다. 그 냄새는 소도시일수록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도 빨리 묻혀버리는 탓일 것이다. 나의 고장에서는 비가 오는 날이면 오후 내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작은 도시이니깐. 다른 이들은 그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의미 있는 냄새도 아니고 특별한 냄새도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 말고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다. 그냥 후각이 조금 발달했던 내가 조금 특이했던 걸지도 모르지.
  가을비가 종일 내렸다. 노란 낙엽들이 길거리를 수놓았다. 공기가 조금 습했지만 바람이 서늘했다.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오늘 꽤 오랜 시간을 홀로 걸었다. 큰길을 따라 도심의 중심부를 지나 외곽을 향해 걸었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소음은 조금씩 잦아들었고 마아가린 향은 짙어져만 갔다. 이 도시의 외곽 거리에는 언젠가부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길을 걷다 보면 사람을 여럿 마주하고는 했지만 이제는 한 명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고장이 그 테두리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멀리 걸어 나갔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자 기사 아저씨께서는 활기찬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 여기까지 산책 나오신 거예요?
  긴 산책으로 조금 피곤했던 나는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 요즘 참 걷기 좋지요.
  기사 아저씨는 기분이 머쓱해지신 건지 혼자 답을 받아넘겼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건방진 태도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쾌활했다.
  신호를 대기하는 사이 기사아저씨께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눈이 침침하신 건지 안경을 눈 위로 치켜들고는 작은 화면 위에 자신의 코를 가져다 대고는 문자를 확인했다.
  - 여보 저녁밥은 먹었지요?
  엄지손톱만 하게 쓰인 커다란 글자들.
  - 손님 죄송하지만 잠시 문자 좀 쓰고 가도 될까요?   
  아저씨께서는 잠시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는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 저녁은 콩나물국밥을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먹었습니까? 전송
  아저씨는 출발을 하려다가 다시 차를 멈춰 세웠다.
  - 오늘은 비가 옵니다. 덕에 손님이 많지 않아 당신을 일찍 볼 수 있습니다. 이따 비가 오면 봅시다. 전송
  - 비가 오지 않아도 봅시다. 전송
  어수룩해 보일 정도록 투박한 화면. 다시 한 번 엄지손톱 만큼이나 커다란 글자들.

  - 죄송합니다. 저희 부인이 몸이 안 좋은데 혼자 있어서 제가 바로 문자를 해줘야 불안해 하지를 않아요.
  기사아저씨께서는 내가 내리려는 곳을 두 블록 남겨 두고 택시비를 미리 계산해 주었다. 자신이 시간을 잡아먹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없이 내리는 나의 등뒤를 향해 오늘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뒤돌아보니 그가 커다랗게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는 중심가였지만 대로변은 여전히 한가했다. 길을 걸으면서 길목 귀퉁이의 꽃자판기에서 꽃 한다 발을 샀다. 조금은 거칠게 생긴 노란색의 자판기였다. 딱히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전 기사아저씨에게서 느낀 그 따스한 감정을 기념할만한 무언가를 찾았을 뿐이었다. 이름 모를 작은 연분홍빛의 꽃이었다. 길 위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꽃을 들고 당당히 홀로 걸을 수 있는 나의 고장이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길가로 택시 몇 대가 간간히 스쳐 지나갔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아스팔트의 냄새라. 나는 붉게 녹슬어 가는 쇠 난간의 외면된 슬픈 냄새는 알아. 그건 피 냄새와 비슷해. 한 때는 페인트가 벗겨지도록 손때를 타고 반들반들해지는 부분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녹슬어버리지. 근데 너는 아스팔트를 이야기하는구나. 아스팔트의 마아가린이라니. 가끔의 너는 참 어리석도록 낭만적인 구석이 있어. 그래도 말이야. 기사아저씨께 좋은 말을 한마디라도 건넸다면 좋았을 텐데. 마아가린이든 슬픈 냄새이든 아무래도 좋잖아. 조금 피곤해도 건방진 태도 같은 건 안 비칠 수 있었다면 말이야. 전송
  아저씨께서는 부인을 만나러 집으로 들어가셨을까. 홀로 그를 기다렸을 부인을 향해 여보 내가 왔어요,라고 인사하며 웃어줄까. 누군가의 건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행복하라는 말을 건네는 그의 삶에 나는 오늘도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가 동경하는 것들은 결국 그런 것. 고요한 지방 소도시의 낭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가는 나의 고장 속으로 마아가린 향이 짙어져있다. 도로변 위로 노란빛 낙엽이 흩날리는 사이 곱다란 마음의 누군가가 냉담한 이들을 마음속에 부끄럼 하나를 피워낸다. 그렇게 자판기 속 분홍빛 꽃향기와 녹슬어버린 쇠난간의 슬픈 냄새가 어우러져 간다. 낡은 도시의 모든 것이 천천히 묻혀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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