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 로그(Work Log)를 남겨라
회사에 다니며 온라인으로만 수업하는 대학원에 등록했다. 생각지도 않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오라는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대면 수업이 없는 학교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한다는 것이 자못 신기했다. 호기심에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1박 2일의 행사는 신입생의 자기소개부터 대학원 생활 소개,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까지 빼곡히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다. 원래 온라인 대학원에는 오프 모임이 별로 없지만, 우리 과만 여러 차례의 오프라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20년간 이어 온 전통이라고 했다.
오프 행사를 제안하신 교수님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라면 온라인 수업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온라인 수업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온라인 교육은 개인주의화 되어 있다. 내가 강의에 들어오지 않아도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하면 점점 기간 안에 들어야 할 강의가 늘어난다. 특별히 의지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포기한다.
전문가들은 공개 온라인 강좌인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가 오프라인 대학을 모두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에 앉아서 하버드나 스탠퍼드 대학의 유명 강의를 들을 수 있다니 이런 혁신이 어디 있냐고 목소리 높여 외친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MOOC의 강의 중 일부는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지만, 학기 단위의 수료율은 채 5%가 되지 않는다. 20명 중의 19명은 중도 포기자가 된다.
우리 평생교육학과 교수님들은 온라인 교육의 단점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온라인 학교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만들고 학생들이 되도록 모두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분들의 생각이 맞았다. 우리 과는 온라인 전용 대학원임에도 불구하고 90% 이상의 졸업률을 자랑했다. 이런 문화를 갖지 못한 다른 온라인 대학원보다 몇 배나 높은 수치다.
문제는 오프라인 세미나는 정규 교육과정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행사는 대학원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했다. 2~3명의 전업주부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직장생활을 하는 상황이었다. 한 기수가 1년간 행사를 운영하고 후배 기수에게 넘겨주는 식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온갖 문제가 일어났다.
직업이나 사는 곳이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세미나에 모이는 그것 자체로도 쉽지 않다. 그런데 운영진 회의를 여러 차례 열어서 이견을 조율해야 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해 커다란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매년 운영진이 바뀐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 어떤 일이건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실수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점점 실패 횟수를 줄이고 실행 수준을 높여가게 된다. 고작 1년만 2~3차례 세미나를 운영하고 다음 기수 운영진에게 넘겨줘야 한다. 시행착오를 극복한 경험이 누적되지 않았다. 간신히 정상에 바위를 굴려 올라갔는데 바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시지프스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어느 날은 세미나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연수원 담당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평생교육학과 학생회장님이시군요. 올해도 예약 방법이 틀리셨네요. 저희는 숙소와 식당을 각각 다른 운영자가 맡고 있어, 별도로 예약을 해 주셔야 해요. 매년 주의해 달라고 말씀드려도 운영하시는 분들이 계속 바뀌니 이 점이 고쳐지지 않네요.”
나는 회사에서 꽤 많은 TFT(태스크 포스 팀)에 참여했다. TFT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는 중간중간 구성원이 바뀐다. 원소속 부서에서 멤버 교체를 희망하는 때도 있고, 직원이 퇴사하는 때도 있다. 새로운 사람은 전임자가 일해 놓은 결과물만 보아서는 왜 그렇게 했는지 알기 어려운 때가 많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아, 그래서 이렇게 해 놓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낭비됨은 물론이다. 누군가 그 과정을 기록해 놓았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즈음에는 애자일 조직처럼 임시로 협업을 했다가 흩어지는 조직 형태가 늘고 있다. 워낙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복잡해지니 기업 경영 과정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일 년 내내 특정 직무를 담당하기보다는 수시로 새로운 일을 맡아 과제를 해결하고 흩어지는 방식이 더 보편화될 것이다. 따라서 일하는 데 필요한 역량 중에서 협업 스킬이 점점 중요해진다.
초일류 기업일수록 혼자 일을 잘하기보다는 일하는 과적을 기록하도록 한다.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에서 박정준 작가는, 아마존 같은 첨단 기업일수록 워크 로그 Work Log라는 일의 주석 달기를 강조한다고 했다. 단순히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것 외에도 어떻게 일을 했는지를 기록해 두라는 것이다. 워크 로그를 잘 작성해 놓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신입사원 시절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선배에게 묻느라 무안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친절히 알려주던 선배도 나중에는 그것도 모르냐며 면박을 주었다. 그 뒤로는 되도록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행착오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야근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어보기 싫다는 오기가 생겼다. 만약 선배가 조금이라도 업무 메모를 남겨 두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자존심을 구기며 묻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선배는 바쁜 시간을 쪼개 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기수가 행사 운영진이 되자 큰맘 먹고 세미나 준비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기록했다. 행사 진행을 위해 각자의 역할은 어땠으며, 예산은 총 얼마를 잡아서 얼마가 남았다, 연수원 예약과 관련해서 주의할 점은 이런 것이다. 등등. 특히 세미나를 준비하면 발생했던 실수를 꼼꼼히 적으려 애썼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아직도 세미나 운영 시기가 되면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들에게 연락이 온다. 내가 작성한 세미나 운영 기록을 받았다면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록된 내용 중 궁금한 것 한두 가지를 묻는다. 통화는 길어지지 않는다. 최근 발생한 문제를 빼고는 대부분이 기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게 전화하는 이유도 내가 문의할 곳 내 번호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직장인은 바쁘다. 늘 분주하고 수선스럽다. 당장 오늘 할 일도 다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일했는지 메모를 남기라니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국 기업에서 문제는 늘 이렇게 생겨난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하는데, 당장 급한 일을 먼저 한다. 중요하지만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은 미루고, 또 미뤄진다. 그렇게 호미로 막을 일아 가래로 막을 일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