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움은 이제 그만

조직의 조화와 차이의 인정

by 임희걸

“회식도 업무의 일환이야. 조직에서 조화로운 인재가 되려면 술도 좀 먹고 해야지.”


내 직장생활의 두 번째 팀장인 L 팀장은 기러기 아빠였다. 집에 가도 반겨주는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퇴근 무렵이 되면 쓸쓸하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 쓸쓸함을 술로 달래려 했다. 흔히 말하듯 매일 같이가 아니라 진짜로 매일 술을 마셨기 때문에, 팀원들이 술자리 상대를 해주기 벅찼다. 결국 팀원 2명씩 요일별로 조를 만들어 일주일 내내 팀장의 음주 파트너가 되었다.


한 명의 팀장 때문에 9명의 팀원이 정해진 요일마다 원치 않는 술자리에 3~4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나는 회식이란 백해무익하고 조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회식이 주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술과 회식에 대해 나쁜 인식이 생긴 건 L 팀장의 영향이 크리라 생각한다.


그는 결국 술에 관련된 사건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지나친 과음으로 사장이 주관하는 중요한 회의에도 술이 덜 깬 채로 참석한 것이다. 처음에는 엄중히 경고하는 수준에서 징계가 마무리되었다. L 팀장은 변하지 않았고 밤마다 술자리를 찾아다녔다. 숙취로 회의 중간 CEO의 질문에 횡설수설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경영진의 눈 밖에 나고, 인사 고과에서 나쁜 평가를 받고, 팀장 직책에서도 보임 해직되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회사를 그만두었다.


“빠르건 늦건, L 팀장은 언제가 저놈의 술 때문에 결국 잘릴 줄 알았어.” 떠나는 L 팀장의 뒷모습을 보고 선배들을 날카로운 비난을 내뱉었다.


L 팀장이 술 먹기 싫어하는 부하 직원들을 술자리에 끌고 갈 때 늘 이야기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화합', '조화', '소통'이었다. 참 아름다운 단어이지만 조직이 개인을 억압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조화로운 국가, 사회, 조직에서 살아왔다


과거 우리는 가정이든 회사든, 국가든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조화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개인의 개성은 감추어야만 했다. 조직이 조화로워지려면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욕망은 억눌러야만 한다. 저마다가 자신이 가진 개성과 자유분방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조직은 다양성은 가질 수 있지만 당장 조화로워보이지는 않는다.


모두가 구세대는 신세대가 개인주의적이라고 혀를 차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씩 개인성을 인식하고 차이를 고려하기 시작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반세기 가까이 조직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했는데 고작 몇 년 개성을 드러낸 것이 뭐 그렇게 큰일인가.


오히려 문제는 아직도 한국의 조직이 조화로움을 추구하려 한다는 점이다. MZ세대의 자기주장이 뚜렷한 편이기에 조직의 리더들도 그들의 눈치를 본다. 이전보다 조화를 강조하는 어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임을 내세운다.


“이번 회식은 희망하는 사람만 오는 거로 합시다.”

“완전히 회식을 안 할 순 없고, 막내가 메뉴나 프로그램을 정해 봐. 자율성을 줘야지.”

“맨날 술만 먹지 말고, 야구 관람 어때? 흥청망청 술 먹는 것보다 몇 배 좋잖아. (팀장이 야구를 좋아한다.)”

최근의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의 마찰은 집단 내에서 개개인이 당당한 주체로 바로 서는 과정에 해당한다. 서로가 가진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라 의견과 취향이 다르다는 점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속으로 썩고 있어도 억누르고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야 뒤늦게 성장통을 겪는 셈이다. 그렇게 갈등을 겪으며 조직은 성숙해지고 있다. 구성원들이 동료는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의 차이 인정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춘기는 개인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시기다. 아이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와 개성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이 정체성이다. 사춘기 아이들이 어른들의 지시를 거부하고, 아빠 엄마와 뻔하디뻔한 대화를 꺼리는 현상은 자신만의 색깔을 내기 위함이다.


부모가 우리 집안의 조화를 깨뜨리는 아이의 유별난 행동을 제지하려고만 한다면 아이는 그 부모를 ‘꼰대’라 치부하고 대화를 거부하게 된다. 나는 사춘기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안의 제사나 친척 모임이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제를 지내는 건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의 풍습이 아닌가. 나는 영혼이나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데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아버지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주장이었지만 당시 나는 꽤 진지하게 생각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말인 우리 아버지가 아이가 생각을 확장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아들에게 최고로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화는 개성과 양립할 수 없다.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 반바지 차림의 근무 복장, 마음대로 꾸미는 책상. 실리콘 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사 풍경이다. 한국의 회사가 이런 모습이 된다면 꼰대들은 제일 먼저 ‘조화롭지 못하다’, ‘질서가 없다’, ‘규율이 흐트러진다’라고 말한다. 창의성과 유연한 업무 처리를 강조하면서도 조화와 질서가 잠시 흐트러지는 걸 참지 못한다. 그러면 진짜 꼰대가 된다.


강신주 교수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20세기 인문학이 대변하는 고뇌는 바로 ‘타자’와 ‘차이’라고 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같고 하나가 되려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문학이 발전을 거듭한 근대에 다다라서야 다른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말과 행동에서 차이가 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이렇게 뒤늦게 깨닫게 된 건, ‘우리는 하나’라는 명제가 그토록 강렬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회가 발전할수록 단순한 형태의 질서를 추구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다양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조화가 필요하다. 때로는 다름을 인정하고 때로는 하나가 되려 하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성숙한 조직은 그런 섬세한 조화를 갖추었다고 믿는다. 그게 직장이든 가족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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