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을 통해 배운다
나는 방송통신대 교육대학원을 다녔다. 방송통신대가 공부에 미련이 남은 만학도를 위한 곳이라는 인식이 남았나 보다. 좀 더 간판이 그럴싸한 대학원을 가는 게 좋지 않느냐고 만류하는 친구도 많았다. 내가 방송대에 진학하게 된 것은 롤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T 님을 숭례문학당의 독서토론에서 만났다. 독서 토론은 모임의 특성상 책 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만 밝히면 되는 것이지, 개인사를 나누기 위한 모임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그때 읽던 책에 리더십 이야기가 여럿 등장했다. 그러자 T 님은 리더십이란 '함께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자기의 일화를 소개했다. 나는 그렇게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T 님은 방송통신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50 가까이 되기까지 전업 주부였다. 본래 대학에서는 이과 전공이었고 회사에 다녔지만, 아이 둘을 낳으면서 육아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착실하게 자랐고 주부로서의 삶도 크게 불만이 없었다. 그러다 둘째 딸이 대학입시에 한 차례 실패하고 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둘째 아이는 '왜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의미를 느끼지 못하니 공부가 점점 싫어지고 의욕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부모는 갖가지 설득을 해 보았지만 아이는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다.
"까짓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 아냐? 뭐라도 하면 되지."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부모는 타당한 설득보다는 당위성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T 님은 자신의 대학생활은 어땠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듯 부모의 의사에 따라 대학을 갔지만 그래도 대학 생활은 재미있었다. 더 이상 시험을 위해서가 아닌 앎의 기쁨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세상이 어렸을 때 보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공 외에도 문학을 읽으며 삶의 이치에 대해 고민했다. 그 시간이 참 소중하다고 느꼈다.
이런 이야기를 딸에게 했더니... 반발이 또 돌아왔다.
"그렇게 대학 공부가 좋으면 엄마나 해."
그래서 그는 진짜로 공부를 시작했다. 방송대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한 것이다.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 합격을 했다. 그때부터 딸은 재수를 하고 엄마는 대학을 다니는, 함께 공부하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본래 딸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학을 사랑했던 대학 시절로 되돌아갔다. 점점 공부에 빠져들었다. 동기들과 원서 강독 스터디를 만들었다. 성적은 최고점을 놓치지 않았다. 각종 운영 임원을 맡아 학생회 생활도 열심히 했다.
본보기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희미해졌다. 그냥 공부가 좋아서 정신없이 영문학 공부에 매달렸다. 어느새 딸 또한 엄마의 그런 모습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부를 해야한다는 당위성만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전혀 느껴지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슬슬 딸에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대학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나? 진짜 나도 한 번 대학엘 가봐야 하나...'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 엔딩이다. 딸은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엄마는 영문학과를 졸업하고도 원서 강독 스터디를 이어오고 있다. 아울러 배움의 즐거움을 확장하고자 독서 토론 모임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T 님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리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후배와 점심을 먹으면 근황을 물었다. 리더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이율배반이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었다. 마치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올바른 방향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동이 달라진다. 차라리 말도 행동도 엉망인 사람이 낫다. 지키지 못할 말이라면 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
직접 행동하는 리더는 참 무섭다. 나는 T 님을 보면서 미친 듯 공부하는 엄마라니 그 모습이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물론 바람직한 모습이니만, 자녀 입장에서 보면 엄청 무서울 것이다. 엄마의 말의 무게가 이전과는 완전히 틀려지기 때문이다. 눈빛을 빛내며 몰입하고 공부하는 엄마의 "공부해라." 한 마디는 얼마나 육중할 것인가?
둘째, '함께'는 참으로 힘이 세다. 우리 아이들이 제일 공부하기 싫을 때는 '나만' 공부를 해야 할 때다. 누나는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나만 숙제가 있다는 이유로 공부를 해야 한다. 엄마 아빠는 예능을 보고 낄낄 거리는데 나만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
물론 아이들을 공부시키려 할 때마다 부모가 함께 공부를 할 순 없다. 과거 한 사람을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모든 가족이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 행위는 일종의 폭력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개개인의 의사는 존중해주어야 한다. 대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다수가 희생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리더로서 아이와 함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매일 아이가 공부할 때마다 함께 공부를 할 수는 없지만 공부 방법을 정하거나, 공부 시간의 룰을 정할 때 정도는 가족이 함께 참여하면 어떨까? 아이가 혼자 외로이 투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를 함께 해야 할지에 대한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솔선수범>은 참 힘이 세다. T 님의 솔선수범을 보고 나도 방송통신대에 가게 되었으니까. 아이와 함께 공부를 한다는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다. 나는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는 모습을 일부러 아이들에게 노출시켰다. 거실에서 리포트를 작성하고 온라인으로 시험을 치기도 했다. <함께>는 사람을 움직인다. 방송통신대도 그렇고 독서 토론도 그렇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기에 공부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언제든 옆을 보면 당연히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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