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의 자락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있는 치과는 과잉진료를 전혀 하지 않는 곳이다. 아무리 찾아도 이곳만 한 곳이 없어서 긴 예약 끝에 살던 동네를 찾게 되었다. 서울에 온 김에 남편과 아이들은 시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나는 호텔에 방을 잡고 혼자만의 시간과 휴식을 갖기로 했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자유의 기운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혼자 카메라를 메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아이 둘을 낳고 긴 육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은 조금 무거운 백팩 하나 메고 걷는 것도 기력이 달린다. 예전의 나와 다른 몸이라는 걸 조금 걷기만 해도 알겠다. 마치 오랜 시간 꽁꽁 얼어있다가 해동된 지 얼마 안 된 생물처럼 뻑뻑한 몸을 느낀다. 그냥 이대로 호텔에 들어가 누워 한숨 자고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고 싶다.
버스를 타고 서울의 풍경을 바라본다. 빽빽한 상가들엔 먹을거리도 참 많다. 초록 초록한 곳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새 초록 풍경이 그립고 숨이 조금 막힌다. 자기가 살던 깨끗한 환경을 떠나서는 하루도 못가 죽어버리고 마는 하늘소처럼.. 나도 어느새 하늘소처럼 되어버린 걸까 더운 공기 탓인지 비실비실 서울 땅에서 숨쉬기가 어렵다.
예약한 호텔 근처에 내렸지만 아직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있어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고도 시간이 남아 근처 광장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김밥과 녹두전을 포장해서 호텔로 향한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가끔씩 휴식이 필요할 때 남편에게 sos를 치고 혼캉스를 하며 휴식 시간을 갖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몸과 정신이 너덜너덜해진다. 호텔로 향할 때엔 평소에 못 읽은 책과 노트북 펜과 노트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기게 되지만 막상 들어와서는 꼼짝없이 누워서 리모컨만 돌리며 쉰다. 평소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고 있으니 이런 시간이 오면 정 반대의 멈춤의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구나라고 느낀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오랜만에 내 옷을 사러 길을 나서 보기로 했다. 익선동을 거쳐 삼청동 그리고 사직동 그가게까지 계속 걸었다. 조금만 더워도 더위를 잘 먹는 나를 지키기 위해 물을 부지런히 마시며 걸었다. 평소에 내 옷 살 시간이 없었는데 이 기회에 나를 위한 옷을 천천히 고를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귀걸이도 샀다. 어제는 몸이 많이 무거웠는데 두 시간 정도 걸으니 몸이 좀 풀린 것 같다. 내 리듬대로 내 속도로 걸음을 걷고 멈춘 적이 정말 오랜만이다.
옷가게에서 천천히 옷을 보고 골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것을 회복하게 했다. 항상 아이들을 챙기느라 나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잃어버린 나의 취향을 챙기고 살펴주는 기분이 들었다. 옷을 두어 벌 샀고 천천히 단골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다시 아이들과 재회했고 나는 빠르게 다시 엄마로 돌아갔다.
입추. 가을이다. 창 밖에는 비가 매섭게 내리고 있다. 시골에 오면서 계절의 절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미세한 변화들이 절기에 담겨 있었다. 텃밭에는 농작물이 한창이고, 잡초와 잔디는 손 쓸 수 없이 많이 자라났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바라본다. 말복이 지나면 잡초들도 힘을 잃는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어느 정도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바람에 실려오는 미세한 차가운 가을 기운을 진작부터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미세한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지금 마치 보물을 접하고 사는 기분이다.
누수로 비가 조금 새고 있는 집에 살고 있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
입추를 기점으로 확실히 바람이 서늘하고 시원해졌다. 장맛비에 집 주변 풀 관리에 소홀했더니 풀이 아주 많이 자라 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는 계속 집 주변을 관리하겠지만 이것도 몇 달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고양이가 있으면 뱀이 안 나온다고 해서 집 뒤뜰에 고양이 밥을 놓았다. 마을의 검은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챙겨준 밥을 먹으며 다녔다. 처마가 없어서 비가 오는 날에는 밥을 못 줬다. 어느 날 고양이가 비에 퉁퉁 불어있는 사료를 먹고 간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비가 와도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다음날 집안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검은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뱀이고 뭐고.. 그냥 고양이가 배고플까 봐 밥을 놓는다.
늦더위도 끝나가는 게 느껴진다. 이제 새로운 계절인 가을을 느낄 준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