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01
표지 이미지 - Pixabay. Free-Photos. 2019.10.25
사람마다 약간 차이는 있겠지만 대학가는 이제 슬슬 중간고사가 끝나갑니다.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찼던 도서관은 이제 조금씩 빈자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대신 대학로 근처 술집에 손님이 꽉 들어차기 시작합니다. 일부 학생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한 두 과목의 시험 때문에 초췌한 얼굴로 공부에 더 열중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학생들은 시험의 결과와 주관적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며 술과 유흥으로 한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교수님은 참 나쁘다. 내가 했던 공부와 노력들을 전부 웃음거리로 만든다." -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댓글의 반응으로 보아 유머로 여겨졌는데, 저는 저 글을 보고 절대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또한 학생 시절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화가 난 적도 있었고, 교수가 진지하게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답안을 공정하게 채점하지 않는다면 정말 나쁜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수한 교수님들이 수업시간에 자신의 지식을 잔뜩 꺼내놓지만,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신뢰롭고 타당한 평가인지 고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재기와 자유가 넘쳐야 하는 대학에서도 시험은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래된 방식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평가가 학생의 암기력을 측정하는 것인지, 이해력을 측정하는 것인지, 적용력을 측정하는 것인지 고민 없는 시험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 시험에 가지는 인식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대학 신입생과 4학년의 인식을 비교하면 극명한 대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대학 신입생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단편적인 공부와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잠시 젖어있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 신입생들과 만나면 4월 초에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학 시험은 어떻게 나와요?"입니다. 하지만 딱 중간고사가 지나면 이 이 질문은 완벽하게 사라집니다. '아, 그냥 열심히 외우는 것이 최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오죽하면 "EBS 다큐프라임, 시험"에서는 서울대 A+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비법을 소개합니다.
1) 교수님의 말씀을 통째로 외우는 것(심지어 농담까지 필기하기)
2) 내 생각 말하지 않기(교수님의 주장과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벼락치기의 효과를 깨닫다.
결국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암기가 중요한 시험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상대평가라는 평가제도 속에서 결국 삶이 타인과 경쟁의 연속임을 깨닫게 됩니다. 학생들은 이 깨달음 속에서 매우 중요한 공부 방법 하나를 경험 속에서 끄집어냅니다. 바로 "벼락치기"라고 불리는 단기적인 시험 대비 방법입니다. 시험 문항의 유형이나 목적 등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지필고사라고 하는 결과 중심의 평가방법은 단기간에 몰아서 공부한 사람과 장기간 꾸준히 공부한 사람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평소 꾸준히 공부하여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보다 시험 기간에 몰아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벼락치기는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의 학생들조차 교수님의 농담까지 필기하여 외워 시험을 치는 판국이고, 교수들도 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꼼꼼하고 어렵게 평가하기보다는 가시적이고 단편적인 결과 중심의 평가방법을 선호하기 마련이니 학생들을 비판할 것도 못됩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벼락치기 공부를 그냥 받아들이고 해야 할까요? 벼락치기 공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단 이것에 대해 충분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벼락치기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벼락치기 공부방법 자체는 반드시 비판할 것만은 아닙니다. 단기간 진행되는 집중적인 반복은 방대한 자료를 짧은 시간에 기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인지정보처리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점 1. 벼락치기만 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이 벼락치기 방법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공부방법을 등한시하거나 바람직한 탐구의 자세를 버리게 되는데서 발생합니다. 짧은 기간에 집중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벼락치기와 같은 공부 방법도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벼락치기를 다른 공부 방법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병행하느냐입니다. 쉽게 말해 ‘벼락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벼락치기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단점 2. 낮은 수준의 공부만 하게 된다.
벼락치기 공부방법은 정보의 처리량만을 놓고 판단하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 습득은 대개 통합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지식의 기억 수준에 불과하게 됩니다. 블룸(Bloom)은 인지적 영역의 학습을 크게 6단계로 제시했는데, 가장 낮은 수준이 지식수준. 정보의 재생, 즉 암기입니다. 무엇인가 분석하고, 종합하는 고차원적 사고는 단순한 기억 수준의 공부로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특정 시험 스타일과 영역에만 한정된 공부를 하게 만들어 폭넓은 사고를 저해하고 조금만 응용하거나 유형이 달라져도 전혀 지식을 사용, 적용하지 못하는 헛똑똑이를 만듭니다. 즉 비판적 사고나 창의적 사고와 같은 고차원적 인지기능에 집중하지 않고 인간의 훌륭한 두뇌를 그저 기억용 메모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빚을 수 있습니다(심지어 그 메모장은 시험을 마치고 나면 즉시 지워지기까지 합니다!).
단점 3. 수동적인 사람을 만든다.
뿐만 아닙니다. 벼락치기와 같은 공부방법은 학생 한 개인을 주어지는 자극에 그저 반응만 하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소 여유롭게 시간을 사용하다가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습관은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공부를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고, 의욕을 떨어트리며 지속적으로 공부하며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동기를 날려버립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마치 파블로프(Pavlov)의 실험에 등장하는 개처럼 자극에 반응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평소 최대한 늘어져 있다가 시험이라는 자극이 등장하면 쨘! 하고 잔뜩 조여주는 것이지요. 당연히 시험이 사라지면 다시 늘어집니다.
학생 잘못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촌극의 책임은 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교육자도 문제입니다. 학습의 정도, 목표의 달성 정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필고사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지필고사라 할지라도 문항의 유형과 출제 방법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가능합니다. -비록 기존 평가의 완벽한 대안은 아니겠지만- 대학 교수 스스로가 여기에 대한 고민과 반성,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도 한 몫합니다.
또한 현장의 교수에게도 지워지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승진이나 호봉 진급을 위해 쌓아야 하는 실적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각종 행정적인 업무와, 비용 절감을 위한 과도한 초과강의, 대학에 따라서는 심지어 학생 모집과 홍보 업무까지 맡긴다고 하니 교수가 교육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가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대학 사회와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결점, 교수의 성찰 부족이 학생들을 벼락치기 공부로 내몰고 있는 셈입니다.
당장의 대학 공부 환경과 시스템 안에서 학생들이 벼락치기 공부를 피할 방법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대학생들에게는 공부보다 취업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고, 졸업 전까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남보다 조금만 늦어지면 패배한다는 인식을 주는 경향도 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벼락치기 공부를 포기하는 것은 공부를 취미로 할 때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이 없고 개선의 노력이 없으면 문제 해결도 없습니다. 교수는 교수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의 입장과 환경에서 단순하고 재미도 없는 공부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