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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13. 2022

나랑 하는 데이트 : 김포 북변동 여행

찐하게 데이트하고 왔습니다. 나랑.


일요일인데, 약속은 없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오늘 뭐 할지 물어봤다. 지난 2주 동안 우리 동네인 장기동과 옆 동네인 구래동에만 있었더니 김포가 지루해져서 서울에 가볼까 했다. 네이버 지도로 여기저기 검색했지만 편도 한 시간 반의 이동 시간을 너끈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마음에 탁 꽂히는 장소가 없었다. 하지만 낯선 곳이 간절했다. 눈에 익지 않은 거리를 보고 싶었다. 그러다 옆 옆 동네인 북변동의 독립서점 게으른 정원이 떠올랐다.

오케이, 오늘은 북변동 너로 정했다. 오랜만에 새 책을 골라 읽을 생각에 신났다.


나갈 준비를 했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한 나는 그동안 편한 옷차림을 으뜸으로 여겼다. 편한 바지, 편한 운동화, 편한 책가방을 메고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당연히 화장은 생략했고, 장신구는 사치였다. 오늘 여행을 떠날 때 기존의 나였다면 대충 씻고 나서 롱패딩, 큼지막한 백팩, 펑퍼짐한 청바지, 후드티를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북변동 여행을 나와 함께하는 데이트로 만들기로 했다.

가볍게 피부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렸다. 오늘 기분에 맞는 반지를 골라 왼손과 오른손 중지에 꼈다. 이번에 새로 장만한 귀걸이 목걸이 세트를 꺼내 정성껏 착용했다. 어두운 빨간색의 스웨터 위에 검은색 반코트를 걸쳤다. 날씨가 쌀쌀하니 머플러도 둘렀다. 가장 좋아하는 워커 구두를 신었다. 디자인이 깔끔하지만 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손이 영 안 가던 가죽 백팩에 책과 만년필, 텀블러를 차곡차곡 쌓아 여행길을 나섰다.

남자친구가 없으니 별의별 짓을 다한다 그치. 여태껏 살아오면서 약속이 없는데도 이만큼이나 나를 정성껏 꾸민 적이 없었다.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며 귀찮게 여겼다. 그래서 혼자 다닐 때는 좋게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놓고 말하면 남루하게 다녔다. 그래도 오늘은 나와 함께하는 데이트니 특별히 정성껏 꾸미고 나가봤다.

어라, 이거 좀 설레고 신난다. 진짜로 데이트하는 기분이다. 분명 내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없는데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발걸음이 경쾌했다. 길 가다가 우리 학교 학생 만나고 싶은 기분일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신경 쓴 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학생들이 남루한 차림새일 때만 꼭 마주친다.


지하철을 타고 사우역에 내렸다. 걸포북변역이 서점과 더 가까운데 굳이 다음역인 사우역에 간 이유는 베트남 현지인이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기 위해서였다.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며 찾아간 식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플랜B로 북변동의 칼국숫집을 향해 걸었다.

아무도 날 모르는 낯선 거리를 걸으며 자존감이 뭘까 생각했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틀어놓은 알쓸인잡 2화에 나온 말 자존감. 요즘 필사하고 있는 '홀로서기 심리학' 책에서 설명하는 자존감.

난 내가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박소연이 내 눈에 꽤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만족의 발원지는 항상 내 마음 밖에 있었다. 하라는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좋은 성과가 있어서 주변에서 날 인정해 줬다. 좋은 친구들이 곁에서 날 지켜줬다. 날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가족 또는 남자친구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운이 좋았다. 덕분에 자신을 향한 만족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충전된 상태를 줄곧 유지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인간관계, 성과, 지위 같은 외적 요소들을 모두 지우고 덩그러니 남은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 자존감의 골격이 야물게 차오르지 못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혼자의 힘으로 견디지 못하고 밖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다.

이런 깨달음을 얻다니,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질 때쯤 칼국숫집에 도착했다.

칼국수 곱빼기가 6000원, 수제비가 6000원이었다. 배가 많이 고파서 칼국수 곱빼기를 먹을까, 수제비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수제비를 선택했다. 잘한 선택이었다. 곱빼기를 시킬 필요가 없을 만큼 양은 푸짐했으며, 수제비는 쫀득쫀득하니 맛있었다. 깔끔하게 비웠다. 다음에 올 때도 수제비 먹어야지.

칼국숫집 바로 근처에 독립서점 게으른 정원이 있다. 일주일에 3일, 금토일에만 문을 연다. 직장인에게는 주말 이틀 모두 문을 여는 독립서점이 귀하고 감사하다. 게으른 정원의 사장님은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서점을 차린 분이라 그런지 지치고 지쳐버린 현대인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이 많다.

난 독립서점을 좋아한다. 사장님의 취향이 가득 담긴 서점의 이름, 그분의 고민과 고민을 거쳐 마련된 책의 목록도, 짧은 코멘트가 담긴 귀여운 쪽지들도, 이 공간에서 데리고 온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립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독립서점은 책의 종류가 많지 않다. 아니 적다. 대한민국에 출간된 책 중에서 극히 일부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너무 좋다. 책을 천천히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고심한 끝에 골랐을 책 표지를 꼼꼼히 감상한다. 어떤 글씨체를 썼는지, 제목을 왜 이렇게 배치했을지, 내 책장에 꽂힌다면 주변 책들과 잘 어울릴지를 생각한다. 그중 마음이 가는 몇 권의 책은 꺼내어 서문을 읽어보거나 목차를 훑어본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면서 짧게 읽어보기도 한다. 내 취향과 맞을지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 보면 고작 책 한 권 고르는데도 30분이 훌쩍 흐른다.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은 전혀 성가시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을 누리려고 일부러 독립서점을 찾는다. 이번에는 마침 막 수제비를 먹고 왔기 때문에 배도 부르겠다, 책을 구경하고 고르는 시간을 실컷 즐겼다.


그렇게 고른 책은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이다. 그렇다, 김칫국이다. 그럴 수도 있지!(민망함에 급발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글쓰기에 더 진심이 된다면 제 몫을 다 한 것이리라.

그리고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임선우 작가의 '유령의 마음으로' 단편소설집을 예약했다.

계산하려고 지역 화폐 카드를 내밀었다. 알뜰살뜰하게 할인 혜택을 누려야지. 사장님이 나에게 김포 분이냐고 여쭤보셨다. 0.05초 고민했다. 김포에 살고 있고, 김포로 주소 이전하긴 했지만 내가 진짜 김포 사람인가. 나는 김포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내가 김포 사람이라고 말하면 부산이 삐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오래 고민하면 날 간첩으로 오해하실까 봐 김포 사람이라고 말하긴 했다.

점점 김포에 스며들고 있다. 김포 페이를 사용하고, 김포의 중고등학교 위치를 많이 알고 있으며, 행정구역의 위치도 어느 정도 감이 잡혔거든. 부산 사투리 쓰는 김포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서점 한쪽의 책상에 앉아 '홀로서기 심리학'을 필사했다. 위태로운 나에게 거의 경전 급으로 인생 조언을 주는 위대한 책이다. 급기야 책의 문장을 소유하고 싶어졌다.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꺼내어 읽고 싶었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다. 사장님이 책상 밑에 온열기를 켜주신 덕에 만년필로 글을 옮기는 그 순간들이 따끈했다. 한 시간을 좀 넘게 썼더니, 오늘의 필사 몫을 마무리했다.

남은 건 마지막 11장이다. 11장의 제목은 "후회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법 - 사랑에서의 홀로서기."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찌르르 아팠는데, 필사할 때도 눈물이 어리는 순간이 있을 거 같다. 마음을 굳게 먹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필사를 마친 뒤 잠시 책을 읽고 서점을 나오려다가, 눈에 아른거렸던 2023년 일력을 3권이나 사버렸다. 19살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과 새해를 강화도에서 맞이하기로 했는데, 29살을 힘차게 살아갈 우리에게 줄 선물로 마련했다. 2023년 1월 1일이 되는 날 함께 일력을 뜯는 순간을 상상만 해도 무지 근사하다. 역시 나는 의미 부여하는 걸 좋아한다. 카톡방에서 친구들에게 일력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놨다. 벌써부터 12월 31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따숩게 앉아있으니 찌뿌둥해져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책방을 나왔다. 다음 주에도 예약한 책 가지러 또 와야지, 신난다.

아직 오후 5시일 뿐인데도 12월 11일의 하늘은 여기저기 어둑했다. 동지까지는 계속 밤이 길어질 거다. 이번 동지는 12월 22일이다. 아까 칼국숫집에서 팥옹심이를 팔던데 그걸 먹으러 북변동에 또 와야겠다. 그럼 다음 주에 수제비 먹고, 그 다음 주에 또 북변동 오겠네.

팥죽을 먹으면서 귀신을 쫓아내야겠다. 음, 쫓는 건 쫌 매몰차다. 귀신도 사연이 있을텐데. (임선우 작가의 '유령의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귀신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냥 뭐 맛있는 팥옹심이 먹을 수 있는 귀여운 핑계를 댈 수 있음에 의의를 두자.


이렇게 옆옆 동네 여행을 마무리하고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오늘 박소연과의 데이트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정성껏 차려입은 나와 쉼없이 수다 떨고, 깨닫고, 고민하고, 다짐하면서 알차게 보내고 왔습니다.

혼자서도 이렇게 충만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니,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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