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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22. 2022

5. 개성이 아니라 취향이에요.

나만의 취향을 아는게 중요해.

요즘 내 엄마는 서브웨이다. 우리 엄마가 서브웨이 창업한 건 아니고, 그만큼 자주 먹는다는 말이다. 고등학생 때는 한솥도시락이, 대학생 때는 학교 식당이 엄마였다. 일주일에 적게는 2~3번, 많게는 5~6번씩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 먹는 중이다.

서브웨이는 복잡한 주문 방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 방법이 낯선 사람은, 알아서 해줄 것이지 하나하나 다 물어보냐며 역정을 내기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주문한다.
"베지 15cm 빵은 허니오트, 슈레드 치즈로 구워주세요. 야채는 모두 다 많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스는 렌치, 스위트어니언, 그리고 사우스웨스트치폴레 많이요!"

베지는 고기 없이 야채만 들어간 샌드위치다. 체중 관리하냐고? 아니요. 전 그냥 야채만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그 느낌이 좋아요. 사우스웨스트 치폴레는 남미풍의 향신료 향이 강한 매콤한 소스다. 직원분들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소스는 가까이 두는데, 사우스 웨스트 치폴레는 사람들이 안 먹는지 가장 멀리 있다. 그래도 전 맛있어요. 제 취향이에요.

이런 사진도 취향이랍니다.

요즘 내 취향을 하나씩 정리하는데 재미를 들였다.  
취향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나에게 가장 알맞은 선택을 하는 거다.
내 취향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언제 기분이 좋은지, 언제 만족하는지, 또 언제 불만족한지를 하나씩 물어봐야 한다. 그런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통해 엄선된 것들이 목록에 추가된다.
취향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별로 안 어울린다는 투의 무심한 말에 공격받아도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면서 내가 내 취향을 믿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쌓은 내 취향들이 나를 설명해줄 때, 그걸 우리는 개성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개성이 하나의 덕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개성이 없는 사람은 어딘가 밋밋하고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정 교과서 단원명도 개성 있는 옷차림이다. 그 단원을 볼 때마다 어딘가 찜찜했다. 동조 성향이 강한 청소년들에게 개성적인 옷차림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굳이 왜 개성을 찾아야 하냐고 생각할 거다. 대중매체에서 독특하다 싶은 정도로 튀거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을 개성적이라고 부르니, 아이들이 개성을 마뜩잖게 바라보는데 한몫한다.


개성에 대한 추앙은 유행을 후지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유행이 나쁜 건 아니다. 몇몇 유행은 정말 고마울 정도로 유행하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나에게는 롱패딩이 대표적이다. 롱패딩이 유행하지 않았다면 합리적인 가격의 롱패딩이 출시되지 않았을 것이고, 난 겨울날 허벅지를 겨우 가리는 외투를 입으며 오들오들 떨면서 보냈을 거다. 다행히 롱패딩의 유행 덕에 남쪽 나라에서 상경한 부산 소녀도 세찬 김포의 추위를 잘 견디며 살아가는거 아니겠어. 파리바게트에서 롱패딩을 묘사한 빵을 출시했을 때 그걸 사다가 제사라도 올렸어야 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유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라 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내가 실제로 만족하는지, 좋아하는지보다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도 따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문제가 되었다.
그간 나에게 아이라이너, 다이어트, 뾰족구두 이런 것들이 있었다. 어휴, 뾰족구두라니. 갓 20살이 되었을 때다. 높은 굽의 구두를 샀다. 친구가 신고 왔는데 그 친구가 어른처럼 보였거든. 그때의 나는 고등학생 티를 벗어 던지고 어른스러워 보이기 위해 신경 쓰고 있었다. 다음날 그 구두를 신고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내 대학은 캠퍼스가 넓은 편이라 수업과 수업 사이에 많이 걸어서 건물을 이동했다. 계속 걷다 보니 구두의 좁은 앞코에서 발가락이 짓눌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맨발로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중간에 기숙사에 가서 신발을 갈아신고 와야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구두를 쳐다보지 않았다. 생각만해도 찌부러진 발가락 떠오르며 상상통이 느껴졌다.
사실 아픈 발도 발이지만 난 높은 굽의 구두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방방 뛰어다니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는 구두보다  운동화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남을 따라 하는 와중에도 내 취향을 알아간다면, 그것대로 꽤나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한다.

개성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나의 기분과 마음을 세밀하게 신경 써서 차곡차곡 쌓아간 나만의 취향이다. 그 취향이 모여서 한 사람의 특징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걸 개성이라 부를 뿐이다.
내 취향으로 삶을 꾸려나가면 매 순간이 내 것처럼 느껴진다. 만족감, 충만함, 풍부함 이런 긍정적 기운이 막 차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잉크와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자면 한 없이 솔직해져서 마음이 잔잔해진다. 달리기를 하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뿌듯해한다. 울적할 땐 운동화를 신고 백팩을 둘러매고 훌쩍 떠난 낯선 장소에서 좋아하는 작가님의 에세이를 꺼내 읽으며 웃기도, 울기도 한다. 브로콜리너마저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을 하다 가사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똑 단발로 자른 머리가 귀여우면서 어려보여 자꾸 거울을 보게 된다. 새로 시작한 알쓸인잡 예능을 보며 지적 호기심을 채워간다.
그렇게 내 취향으로 채워진 삶은 맞춤 양복 같다. 너무나 편안하면서도 내 매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준다.
또 다른 취향도 궁금하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 있을 테니, 지금 있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두려워 말고 새로운 것을 하나씩 도전하면서 또 반가운 취향을 맞이해봐야겠다.

떠오르는 취향들을 적어본다.
서브웨이 베지 샌드위치, 채도가 낮은 탁한 색의 만년필 잉크, 혼자 할 수 있는 단순한 운동들(달리기, 수영, 케틀벨, 클라이밍), 백팩, 한수희 작가님의 에세이들, 반지, 텀블러, 단발머리, 알쓸 시리즈 예능, 운동화, 게스트하우스, 배낭여행, 웃기게 찍은 사진들 등등등

목록들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역시, 나만의 취향을 알아가는 게 정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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