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얼간이' 감독이 종교를 건드리다
2015년 티스토리에 썼던 글
대
영화 '세 얼간이' 감독이 만든 새 영화를 제작했다고 하길래 하길래 개봉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영화일까 기대했는데, 세상에, '종교'의 영역을 다룬다고 한다.
세 얼간이는 '교육'을 건드리고 이번에는 '종교'를 건드린다라.. 아악 더 보고 싶어!
세 얼간이에서 히라니 감독의 따뜻한 극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종교'라는 더 심오하고 날이 선 이슈도 세 얼간이처럼 부담 없이 전할 수 있을까? 궁금하면서 조금 걱정도 되었다. 눈치 보느라 이도 저도 안될까 봐.
영화를 보고 난 지금,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렴 종교의 나라라고 불리는 인도에서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드려고 했다면 엄청난 고민과 논의들을 했었겠지.
난 그저 영화관에 앉아서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눈으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었다. 중요한 장면들에서 대사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원문이 아닌) 번역되어 나오는 자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영화 피케이(PK)는 종교를 향해 유쾌하게 웃으며 핵펀치를 날린다. 보는 내내 사이다였다.
오늘 후기는 주인공이 종교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위주로 써 보려고 한다.
※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이 들어가 있으니 스포 당하기 싫으신 분들은 영화 보고 와서 읽어보시길!
영화는 구도자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어떠한 특정한 신념이나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러한 캐릭터를 지구에서 찾지 못했는지 사람과 똑같이 생긴 근처(?) 행성의 외계인을 등장시킨다. 바로 이 외계인이 영화의 주인공 피케이(PK)다.
그가 지구에 가지고 온 유일한 물건은 우주선을 다시 불러드릴 수 있는 목에 매는 (보석같이 반짝이는) 리모컨뿐이다.
하지만 지구에 내린 지 1분 만에 그 중요한 것을 도둑맞는다 크킄ㅋㅋㅋ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정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인간의 이기성을 표현하는 첫 장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메시지 중 하나가 '인간의 이기성'이니깐.
여기에서 영화는 여주인공(자구)이 유학 가 있는 지구 반대편의 벨기에로 우릴 인도한다. '같은 날, 5000km 떨어진 벨기에'이라는 자막이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특정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종교라는 인류의 이슈를 논하기 원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든,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자전거와 함께 등장하자마자 남주급의 남자(살프라즈)가 등장하고, 볼리우드식 형태를 띤 초스피드 사랑 전개가 이루어진다. 문제는 힌두교인 자구가 사랑하는 살프라즈가 무슬림이라는 것이다. 딱 봐도 팽팽한 갈등구조가 나오지 않는가. '힌두교인과 무슬림의 사랑' 했을 때 속으로 '오 이거 센데?'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종교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종교인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디테일은 후기의 목적상 생략)
두 남녀 주인공의 소개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영화는 6개월 후로 점핑해 외계인 피케이와 TV 리포터가 된 자구의 첫 조우를 그린다. 지하철에서 '신을 찾습니다'라는 특이한 전단을 돌리는 피케이를 만난 자구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뉴스거리가 될 것을 감지해 그에게 다가간다. 이때부터 영화는 피케이가 지구에서 겪었던 6개월을 회상하는 모드로 전환된다. 코믹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이야기이다.
피케이는 집에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우주선 리모컨을 눈앞에서 도둑맞았다. 그 순간, 그는 우리 인간과 공통점이 생긴다: '소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소원이 생긴 것이다. 리모컨을 도둑맞음으로 그는 수동적인 '외계인 지구탐사원'에서 졸지에 지구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리모컨을 찾는 능동적인 '리모컨 구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옷으로 몸을 가린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인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피케이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이 웃기도 했지만 그 순수함이 세상의 불합리함을 고발하는 장면들에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모컨이 비싼 물건이라고 하자 대도시로 가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대도시(델리)로 간다. 거기서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는 경찰에게 자신의 도둑맞음을 하소연하며 그 리모컨을 찾아주기를 요청했지만 당연히(?) 가볍게 묵살당한다. 천만명이 넘는 사람 중에 도둑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의 마지막 한마디에 피케이는 힌트를 얻는다:
신에게 물어보라.
그렇다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에 직관적인 답이 나오는 사원으로 피케이는 향한다. 거기서 판매(?)하는 신을 사서 드린 배고프다는 그의 첫 기도는 정말 신통하게 응답(?)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소원, 리모컨을 찾게 해 달라는 기도에는 신은 묵묵부답이다. 혹시나 정성이 부족해서일까? (상인들에게 속아) 제물을 사서 사원 안으로 들어가 엉겁결에 제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었지만 역시나, 즉각적인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을 잘못 찾았을 거란 조언을 들어 교회에서 세례도 받고, 이슬람 사원에서 절도하고, 갠지스 강에서 목욕재계, 하다못해 무릎으로 걷기, 옆구르기 같은 고행도 마다했지만 신과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라는 것을 다 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절박감에 무언가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쳐가는 그가 밤에 신들의 조각상 앞에서 드리는 눈물의 호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잊히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표현하지 않는 그들의 내면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많이 아팠던 장면이었다.
자신에게 자꾸 잘못된 사람을 찾는 전화가 걸려오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장난치는 자구를 보며 피케이는 큰 영감을 얻는다:
신과 우리 사이에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신의 뜻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우리가 전화를 잘못 걸어서 신이 아닌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고 그가 신인 것처럼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신에게 드리는 기도를 전화에 비유한 것도 참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했고, 그 전화번호가 틀렸다는 비유 또한 참 인상적이었다. 무언가를 믿는데, 그 믿음의 대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영화 내에서 그 믿음의 참 대상이 무엇이라고 언급은 할까나 하는 궁금증을 안고 계속 봤다.
자신이 맹신하고 있는 힌두교 사제를 자꾸 디스 하는 것이 불편했던 자구의 아버지는 직접 방송국으로 찾아가 자구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을 치고, 뒤에 있는 피케이에게는 얼마면 되겠냐고 지금 이러는 것이 다 돈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합의를 보려고 한다. '구도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종교인들까지도 결국엔 돈과 명예가 궁극적인 목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풍자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피케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얻는다:
사람들의 종교적 열심이 '두려움'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백 프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굉장한 통찰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피케이는 자구의 아버지를 시험기간을 지나고 있는 한 학교로 데려간다. 거기에 큼지막한 돌을 하나 세우고, 빨간 물을 들이고, 밑에 돈을 좀 뿌려놓아 '신'의 모습을 갖춘 다음 시험기간을 지나고 있는 불안한 학생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멀찍이서 바라본다.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생기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학생들이 지나가다 처음엔 하나 둘 돈을 바치고 기도를 하다가 나중엔 아예 줄을 서서 돈을 바치고 앞에서 기도를 한다. 이 장면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 감독은 옆에서 차(tea) 장사를 하는 한 상인을 등장시킨다. 많은 시간을 들여 재료를 준비하고, 차 몇 컵을 팔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는 상인에 비에 돌 하나 세워놓은 곳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머리를 숙이는 장면을 대비하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종교 장사'에 사람들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막강한 종교권력을 가진 힌두교 사제와 끝장토론을 앞두고 있던 피케이는 자신의 리모컨을 훔친 사람을 알게 되고, 그 리모컨을 많은 돈을 주고 산 사람이 힌두교 사제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또한, 힌두교 사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정적으로 신과 인간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번호'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피케이는 깨닫게 된다. 드디어 구도자의 순수함이 인간의 부패함과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니가 내 리모컨을 뒷돈 주고 샀으면서 신이 선물로 줬다는 개구라를 까고 있어?!!!'라고 폭로전으로 갔을 수도 있었지만 피케이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혼란에 동참하게 한다. 솔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을 사람들은 많이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를 꿰뚫는 대사가 여기서 나왔다:
"저는 두 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당신들을 만든 신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들이 만든 신입니다."
그렇다, 외계인의 입장에서 내린 피케이의 결론은 인간이 만든 신이 이 모든 폐단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진짜 신의 유사품을 만들어 종교 장사를 하는 현대의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경고인 셈이다. 종교의 나라인 인도에서, 이러한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기독인으로서, 부패한 힌두교 사제의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이 겹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가 한국을 배경으로 했었다면 종교인의 대표 격인 힌두교 사제 대신 정장을 입은 교회 목사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사가 주 악역으로 나오는 영화가 제작이 되고, 또 그러한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인도에서 일어났다. 왜 그랬을까? 물론 이 영화는 남녀노소를 위한 흥행요소가 영리하게 포진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히 여기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가지 않고 직구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히라니 감독 특유의 따뜻한 전달법과 절묘한 줄타기의 균형이 가미되어 역대 인도 영화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는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신은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인도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 영화는 종교를 '인간의 소원을 이루는 수단' 그 이상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종교는 '신의 뜻'을 알고 내 인생을 그것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이 기쁜 일일 수도 있고 슬픈 일일 수도 있지만 나를 신의 뜻에 맞추려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이라는 생각이다. 반면, 나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사용한다면 인간의 특성상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영화에 나오는 사제처럼 말이다. 나도 언제든지 저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피케이'라는 단어는 인도어로 '술 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술 취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구도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여지가 없는 현대인을 비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구도자들을 술 취한 사람으로 여기는 현대사회를 비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주인공의 이름이 피케이로 불리게 된 이유가 주인공의 순수한 행동들이 그들의 눈에는 술 취한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이미 사람들 안에는 그들만의 틀이 있고 그 틀을 벗어나면 묻지 마 혐오와 증오, 심지어 폭탄테러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주인공의 순수한 질문은 술 취한 사람의 질문으로 치부해버린다.
감독은 이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정말 누가 술 취한 사람인 걸까?"
보너스 - 재미있는 영화 정보(출처: imdb.com)
- 힌두교 단체에서 이 영화 상영금지 요청을 했었지만 대법원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 피케이가 엉덩이 먹는 이발사 바지를 떼주는 장면은 12번이나 NG 끝에 겨우 통과되었다고 한다
- 주인공 피케이의 의상은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 이 영화의 후속 편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오 기대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