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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Jan 17. 2024

쉼도 포기하게 만드는 애끓는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큐티 묵상 (막 6:30-44)


오늘 본문은 유명한 오병이어 본문이다. 매번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내가 작은 도시락을 드릴 믿음이 있는지를 되물었지만 오늘은 왠지 제자들을 쉬게 하려 하시는 예수님과 그러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끝까지 쫓아가는 무리들에게 눈길이 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행받아 막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는 익사이팅한 전도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니 휴식이 필요했을 터.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신 것은 이 본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딱 두 번이다.


쉼. 이것을 왜 묵상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열심히 사역, 혹은 일을 할 때가 있지만 사람이기에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본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밤늦게까지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다음날 새벽같이 기도하러 가시는 철인의 면모만 보이시는 것 같지만 제자들에겐 여행 다녀오느라 피곤할 테니 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뭔가 위로가 된다. 쉬는 것에 쉽게 죄책감을 가지는 코리안으로서 꼭 필요한 말씀인 듯. 언제까지 쉬느냐, 참 쉼은 무엇인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잠깐이지만 지금 나에게 주시는 쉼을 최대한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쉼 이후에는 또 할 일이 많을 테니.




그리고 무리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자 귀신같이 알고 먼저 달려가서 기다리는 이 무리들은 어떤 사람인가. 이들을 이토록 열정적, 아니 절박하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문득 이 당시의 이스라엘이 처한 정치상황이 떠올랐다.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압제로 인해 힘들고 내부적으로는 로마에 기생하는 자들에 치이는 소망을 잃은 서민들이 떠올랐다 - 마치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처럼.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방식이든 메시아였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아픈 자들이 회복되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소망 없던 삶에 예수의 존재는 희망이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아이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이던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메시아였다.


예수님은 아셨다. 그들이 정작 그들을 이끌어야 할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목자 없는 양들인 것을.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다. 얄팍한 성경 지식이지만 '불쌍히'라는 단어의 원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 직역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은 한참 부족하고 '애끓는' 혹은 '사무치는 '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감정은 아이를 낳고서야 제대로 느껴봤다.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가 열이 펄펄 나서 먹지도 못하고 힘들어 울지도 못할 때 정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생각을 수백 번도 더 하는 이 애끓는 마음을 직접 겪어보니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무리를 보셨는지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됐다.


예수님 정도는 아니지만 나에게 이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부류들이 있다. (기득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불의한 시스템에 희생되지만 어느 사회안전망에도 보호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바빠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어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때까지는 내가 어떻게 이 불의한 시스템을 고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일단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주신다.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행할 때 이 아픔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할 것을 믿는다.


누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장정만 오천명이 먹으리라 상상이나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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