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는 VIPKID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키워드로 미국교과과정 기반, 그리고 북미권 원어민 강사, 이렇게 2가지를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에는 한국같은 국정교과서나 검정교과서가 없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교과서 만들거나 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교과과정 기반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본적으로 미국의 학교들은 공립, 사립 관계없이 커리큘럼 선택의 자율권을 가진다.
학교장 및 각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가 자신이 맡은 수업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워낙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하는 나라이다보니 교육에서도 한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홈스쿨링 또한 굉장히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고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수업시간에 배우는 교과서는 어떤 것을 사용하게 될까?
사실 교과서라고 따로 정해놓은 것은 없다. 한 학기 내내 교사가 지정한 소설책만 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도 일정한 커리큘럼과 학습활동이 갖추어져 있는 교재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수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교사가 생각했을 때 혹은 해당 학교에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교재를 고르게 된다. 검인정 등의 절차가 없기 때문에 교과서 선택의 제한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 유명한 출판사, 예를 들면 맥그로힐이나 휴튼미플린, 하코트 등에서 출판한 교재 패키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은 커리큘럼이 체계적이고, 본 교재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워크북, 교구, 교사용 지도서, 특히 요즘은 온라인 학습활동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가격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한 학교당 필요한 만큼 수량을 구입하여 여러 학생이 함께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공통된 커리큘럼이 없다보니 각 학교 별로 자유롭게 커리큘럼을 정하여 운영해왔다. 몇몇 교육열이 높거나 공교육에 관심이 있는 주에서는 주정부 차원에서 성취도 기준을 마련해놓는 일도 있었고, 그러한 주의 공립학교에서는 해당 기준에 따라 수업을 진행할 것을 권고받았다. 그것을 따르느냐 마느냐는 교사의 권한이었지만.
여기까지가 200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학교에서 해왔던 커리큘럼과 교과서 선택의 프로세스였다.
하지만 지난 부시 정권 무렵부터 미국의 학력 저하가 심각하다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특히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들조차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읽기와 쓰기가 안되고 기본적인 수학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미국 공교육의 부실함을 지적하며 이를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사적영역의 자율권을 굉장히 중요시여기며 교육도 일종의 사적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인데, 그러한 배경에서 부시정권에 추진되었던 법안의 이름이 바로 No Child Left Behind(약자로 NCLB) 이다.
어떤 아이들도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기막힌 이름을 지어놔서 대부분 이 법안을 대놓고 비판하거나 반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사실 이 법안의 골자는 전국적으로 공통된 수학능력평가를 초3이상부터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수준이 떨어지는 학교를 금전적, 제도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일정기간 안에 성취도가 오르지 않으면 지원을 중단하고 심지어 기존의 지원제도조차 박탈하는 조항 때문에 가난하고 학력성취도가 떨어지는 학군에서는 (특히 대부분의 대도시 슬럼가 지역의 학군들) 심하게 반발했으나 어쨌든 미국의 교육 상황이 심각하다는 전체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여서 법안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에 나는 미 동부 지역의 도시의 공립학교에서 ESL 보조교사로 있었는데, 지역 내의 대부분의 공립학교가 라틴계 이민자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난민 학생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라틴계 그리고 난민 가정의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ESL 과정에 속해 있었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리딩 성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지원 예산의 규모가 부족한 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어서 교사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NCLB 자체가 급조된 감도 없지 않아 있어 여러모로 보완해야할 부분이 많았기도 했다. 교사와 학부모가 모여 산발적으로 시위를 하거나 항의서를 작성하거나 하는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결국 ESL 학생이나 장애 학생을 위한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고 추가적인 지원도 생겨나게 되었다. 일부 강경한 교사들의 바램대로 NCLB의 시행 자체를 막는 것 자체는 어려웠지만, 현행 제도 내에서 최대한의 타협점을 이끌어낼 수는 있었다.
아무튼, NCLB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능력평가에서 각 학년별로 성취도 기준에 부합하는가를 평가해야 하므로, 전국의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학년별 성취기준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즘 가장 핫하게 일컬어지고 있는 미국교과과정의 정체인 Common Core State Standard, 줄여서 커먼코어인 것이다.
커먼코어가 모든 과목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리딩Reading과 수학만을 중점적으로 pre-K부터 12학년까지의 기준을 마련해 놓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커먼코어 사이트를 참고해보자: http://www.corestandards.org/)
부시정권부터 시행된 NCLB 법안은 오바마정권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심지어 더 강화되기까지 했다. 오바마가 한국 학생들의 성취도와 미국학생들의 성취도를 비교하여 언급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에 발맞추어 커먼코어도 초창기에는 몇 개의 주에서만 받아들여 시행해왔으나,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커먼코어를 기반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맥그로힐 등의 유명 출판사는 당연히 커먼코어 기반의 교과서를 앞다투어 출판하고 그 점을 주요 셀링포인트로 잡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해당 법안으로 인해 학교의 성취도 수준이 평가되고 국가 혹은 주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개 학교 입장에서는 거부를 할래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한국 영어교육 시장에서 주요 키워드로 일컬어지고 있는 미국교과과정이라는 것도 교재나 커리큘럼을 커먼코어 성취도 기준에 따라 구성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미국정부가 인정한 교과서를 가져와서 한국에 번역본 형식으로 출간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정부에서 인정한 교과서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따라 국가에서 자격을 인정한 교사에게 국가에서 인정한 교과서로만 배우는 체제에서는 조금 상상하기 힘들 수는 있겠다.
추가적으로 커먼코어는 위에서 리딩과 수학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리딩 Reading이 과연 어떤 교과목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리딩은 좁은 의미로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국어를 가리키지만, 결국 리터러시 Literacy 능력, 즉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모든 교과목을 의미하므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져서, 역사, 사회 과목이나 윤리,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지게 된다. 즉 과학과 수학, 그리고 예체능을 제외한 나머지 교과목 전반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과학과목에 대한 기준을 따로 없을까?
당연히 있다. 커먼코어와 함께 과학과목도 기준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뉴제네레이션(정확한 명칭은 New Generation Science Standards)라는 이름의 과학 교과목 성취도 기준이 있다. 이 또한 여러 학교에서 커리큘럼 구성을 위한 성취도 기준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교재도 유수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교과과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했는데,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들 수 있다. 도대체 왜 영어를 배우는데 남의 나라 교과과정을 가져와야 하는가? 영어 단어나 문법을 배우고 회화 훈련 열심히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이 의문에 대한 생각은 다음 글에서 탐색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