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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야 Jan 23. 2021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선량한 차별주의자』(2019)_김지혜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말이다.’(P.10)


‘결정장애’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들 쓴다. 이주외국인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들도 거부감 없이 했을 말이다. 어떤 분들은 이 말에 차별이 있다는 것에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좋은 의도로 하는 이야기다.” 등으로 대꾸한다. 그러나 이 말에는 분명한 차별이 담겨있다. ‘장애’는 부족하다는, 한국인과 외국이이라는, 장애인은 희망이 없다는, 전제가 내포되었다. 우리 삶에 익숙한 말과 행동들로 수많은 차별이 이루어진다.


"제주토박이세요?"

"토박이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살아야 제주 토박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나요?"

몇 년전 한 분과의 대화에서 나는 선주민-이주민이라는 경계를 만드는 대화를 했다. 나는 같은 도민이지만 그 경계를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오래 살아온 나는 지역유지처럼 우월성을 뽐낸 것이었다.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p.79)


많은 차별 중 이슈가 많이 되어 익숙한 ‘성차별’를 예를 들면 이해가 편할 것 같다. ‘성평등’정책으로 인해 ‘역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과거의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현재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사라졌을까? 이미 기울어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들은 ‘가진 자의 여유’로서 호의성 정책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권력행위이며, 남성들은 기존의 삶에서 장벽들이 생기면서 역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남성들은 많은 특권을 누렸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남성권력 외에도 많은 특권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런 특권을 누려온 사람이라 생각한다. 남자라서, 장남이라서, 학벌로, 지역출생으로, 청년세대 중 나이가 많아서, 이런 특권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특권은 더욱 많을 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발견하다. 그래야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p.91)


많은 분들이 평등한 사회를 말하고, 차별이 없길 바란다. 저자가 희망적이라 말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차별들이 숨겨지고, 지워진다. 드라마 「미생」에서 햄세트와 식용유세트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보는 차별이다. 그러나 ‘제한된 자원’, ‘능력주의’라는 말로 차별을 숨겨버린다. 제한되어 있는 자원을 차등하는 것, 특권으로 만들어진 능력평가. 이 모두 차별을 공정과 평가라는 말로 숨기고, 지운다. ‘선량한 차별자주의자’가 이를 찾아내고, 바꿔간다면 우리가 꿈꾸는 차별 없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조금 더 용기내길 바란다.


모임 자리에서 누군가를 놀린 후 “농담이야”라는 말을 한 번씩은 써봤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다. 누군가를 비하한 차별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상대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냐며 차별을 숨기고 지워냈다. 이에 대해 숨길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우리가 차별을 없애기 위한 시작이다. 실수를 덮는 것보다 고쳐가는 모습이 좀 더 나은 모습이니깐. 그렇게 하나 씩 시작해보자고 다짐한다.


‘성소수자, 이주민 등 특정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면, 그건 평등이 아니라 우대를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P.183)


여성활동가, 청년활동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등한 평등이 이루어져 이 활동이 종결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형식적 평등이 아닌 ‘같은 기준을 동등하게 적용’하는 실질적이 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필요한 여러 정책과 제도들을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다만, 현실의 불평등한 조건과 다양성이 고려되는 적극적 조치를 위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저자는 주장한다. 지금 ‘차별금지법’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빨리 모든 차별을 없애기 위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길 나 역시도 간절히 바란다.




2020년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반성을 하게 한 책이다. 독서모임에서 추천을 받았고, 주변 지인들의 SNS에서도 접했다. 한 독서모임에서 선정되어 이 책을 펼 수 있었다. 읽는 내내 책은 내가 한 행동과 말을 돌아보라 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부끄러운 나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은 한 판결문에서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p.117)라고 말했다. 이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구성원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 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사회인가.


영화 「두개의 빛 : 릴루미노」에서 주인공은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이에 익숙해져서 혼자서도 불편함 없이 잘 지내려 한다. 그러다 길을 잘 걸어가던 그에게 비장애인은 다가가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지만, 주인공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사양한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말라며 도움을 주려한다. 둘 사이에 실랑이가 생기고 잘 걸어가던 주인공은 길에 넘어지고 비장애인은 예민하게 반응하냐며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불편함 없이 지내던 그는 그 자리에서 좌절감을 느끼면서 다시 일어나 길을 걸어간다.


비장애인의 행동은 분명 선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이었고,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필요한지 물어보거나, 사양하면 자연스레 넘어갔다면 어땠을까. 나도 착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과한 친절과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도움은 오히려 나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다.


배려는 우리 사회에서 선한 행동으로 뽑힌다. 그러나 존중 없는 많은 선한 행동들이 차별로 바뀌는 모습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선한 행동도 이와 같은데 생각 없이 한 말과 행동들은 얼마나 많은 차별이었을까. 이 책으로 나의 말과 행동을 돌이켜봤다. 참 많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내 모습을 생각해보니 이 책이 더 많이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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