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뤼 Oct 04. 2021

우리 집 거실에서 TV가 사라진다면?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중심으로

화요일이다. 밤 10시부터 일이 손에 안 잡히기 시작한다. 남은 20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모르겠다. 알람까지 맞춰놨다. 10시 20분, 땡! 알람이 울리자 방에서 나와 70인치 TV 앞으로 향한다. 앗! 오빠가 먼저 가운데 자리를 선점했다.


“야야,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

“아~쒸.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오빠 말을 끊고 소파에 털썩 앉는다. 결국 오빠가 직접 간식을 챙겨 온다. 치사하게 쏠랑 자기 것만 갖고 온다.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한 주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방영한다. 오빠와 내가 하나 되는 시간이다.



우리 남매는 원수 지간 못지않게 사이가 나쁘다. 눈만 마주쳐도 ‘바보 멍청이’ ‘똥 싸’와 같은 악담을 퍼붓는 건 기본이고, 마지막으로 카톡을 주고받은 게 언제인가 보아 하니 올 초다. 그 마저도 '헤이, 엄마가 몇 시에 들어오녜'라는 엄마의 말을 대신 전하는 메신저로서 소통했을 뿐이다.


축구선수를 꿈꾸다 고등학교 때 그만두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빠보다 언제나 빠릿빠릿하고 영특했던 나는, 2살 많은 오빠를 언제나 깔봤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오빠를 한심하게 여겼다. 작년 말,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으로 부임한 미국 최초 여성 부통령이 누구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미셸 오바마’라고 외치는 오빠다. 미안하지만 나는 세상사에 이렇게도 무심한 사람들과 상종하기도 싫다.


사이가 나쁜 것은 둘째 치고,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각자의 생활에 열중하느라 싸울 시간조차 없어졌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의 듣고, 각종 동아리 활동과 팀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누군가와 말을 섞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쁜 현대인들은 집에서 마저도 개인플레이하기 바쁘다. 방 안에 틀어 박혀 있으면 할 일이 넘쳐난다. 무엇보다도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TV나 PC 등을 공유하지 않게 된 식구들은, 각자의 기기로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느라 정신이 없다. 가상의 공간에서 만날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넘쳐나기에, 굳이 당장 눈앞에 있는, 공기처럼 곁에 맴도는 식구들과의 교류는 늘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그래서 모바일이나 노트북과 같은 이동형 기기로도 충분히 원하는 정보와 콘텐츠를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오늘날 TV가 각 가정의 거실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 그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TV가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더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식구들 간 유대감을 인위적으로 형성할 수 없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TV는 가족에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제공한다. 각자의 삶에 매몰돼 있었던 탓에 서먹함/어색함/머쓱함 만이 남은 관계의 틈을 문화적 공감대가 메운다. TV는 온 가족을 같은 감성으로 묶어놓는 힘이 있다.


요즘엔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우리 남매 사이를 한 데 묶는다. '스. 우. 파.'를 시청하는 시간만큼은 둘도 없는 짱친이다. 어쨌든 거실로 나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당장 시청 중인 TV프로는 어색하고 뻘쭘한 공기를 전환시킬 화두 거리를 던진다. ‘오늘 뭐했어?’ 내지는 ‘학교 생활 안 힘들어?’와 같은 안부 인사는 난데없고,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하니, 우선, 화면 속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서서히 시선을 서로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지난 5화에서는 ‘메가크루 미션’의 결과가 공개됐는데, MC 강다니엘이 점수 합산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아 조회 수보다 좋아요 수가 더 중요하겠네”라고 코멘트하는 오빠에게 “응 그치그치” 라고 호응을 했다. 별 대수롭지 않은 대화 같지만, 하루에 말 한마디 섞을까 말까 한 우리 남매에게 이 정도면 죽마고우들끼리 나누는 대화와도 다름없다.


각 크루의 최종 무대 영상과, 저지들의 점수가 공개되는 자리. 라치카의 무대 영상이 스크린에 띄워지기 무섭게, 멤버 시미즈가 눈물을 글썽였다. 3분짜리 영상 속에 압축된 이들의 노력과 시간이 조금은 가늠이 될 것 같기도 해서, 괜스레 내 마음도 찡해진다.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우네”라고 애써 내 감정을 숨겨 보지만, 이미 동요한 감정을 눈치챈 오빠는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다. 겉보기엔 그냥 놀리는 것 같지만, 평소 말을 걸면 못 들은 체 무시하고 마는 오빠이기에, 나를 조롱하는 웃음도 동생을 향한 애정과 관심임을 안다.


때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가 “댄서들끼리 배틀한다 생각하고 나왔는데, 연예인이랑 싸운다는 게 존나 웃겨”라고 욕하는 대목에선, 나는 아이키의 변호인-오빠는 모니카의 변호인이 된 것 마냥 설전을 벌였다.


“아니, 어쨌든 무대의 완성도 차원에서 수영의 섭외는 필요했던 것 같아. 분위기가 탁 반전되잖아.”라고 말하자 오빠는


“그래도 모니카 말이 맞지. 이 프로그램의 취지 자체가 어쨌든 가수 뒤에 묻혀 있던 댄서들을 집중 조명해보자는 건데..여기서도 무대 뒤에 세우면 안 되지”라고 반박한다. 그렇게 날 선 주장들이 몇 번 더 오고 가다, 프라우드먼의 무대가 시작되자 금세 조용해진다.


“ㅋㅋㅋㅋ나는 립제이가 제일 좋더라!” 오빠가 말한다.

“립제이도 좋은데, 나는 캐릭터로는 가비 ㅋㅋㅋ”

“우우우, 실력도 캐릭터도 립제이지”


그렇게 투닥투닥거리다, 프라우드먼의 무대가 끝남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친다. “찢었다 찢었다”. “진심”.


1970년대 무렵 TV가 상용화되기 시작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TV 덕분에 집 안에서 가족끼리 모여 앉는 시간은 늘어난 반면, 서로 대화하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TV는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향하던 시선을 독점했고 ‘소통의 의제’를 제약했다고 한다. 개인 미디어 중심의 콘텐츠 소비행태가 보편화된 오늘날엔, TV 방송이 제공했던 최소한의 연대 틀마저도 사라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TV라는 매체는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무언가다. TV는 흩어진 가족을 다시금 한 데 묶을 희망과 유대의 끈이다. TV가 없는 거실의 여백은 이내 더 깊고 고요한 침묵이 메울 것이고, 가족은 점차 무늬만 '가족'인 개인주의적 공동체로 변할 것이다. TV가 사라진 우리 집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드디어, 화요일이다. <스. 우. 파.>를 구실 삼아 오빠랑 오손도손 수다를 떨고 싶다. 만에 하나 약속이 생겨 귀가가 늦어진다거나, 오늘은 할 일이 많이 방에 있겠다고 하면 내심 서운할 것 같으니. 카톡 대화방의 해묵은  침묵을 깨고 선톡을 날려보기로 한다.


“hey~ 오늘 <스우파>하는 날임 ㅋㅋㅋ”

매거진의 이전글 변하지 않는 집단이 어디 군대뿐이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