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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 Oct 27. 2018

나는 빨강머리앤이 싫었다

어린시절 나는 어딘가 빨강머리 앤이 불편했다.


방영 초기엔 한참을 놀다가도 빨강머리 앤 방영시간이 되면 TV 앞을 지켰다.


재미는 있었지만 빨강머리 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요술을 부릴 줄 알았고 변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잘 해냈다.


웨딩피치가 그러했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세일러문도 마찬가지였다. 천사소녀 네티뿐 아니라 카드캡터 체리도 모두가 요술을 부려 적을 물리쳤다.  


빨강머리 앤은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변신을 할 줄도 모르고 주근깨를 가리고 미인이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치원도 가지 않았던 어린 나이였지만 나에게는 빨강머리 앤이 지극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천방지축으로 동네를 다니다 사건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늘 웃었기 때문이다.


다른 만화 주인공들처럼 지구를 구하겠다는 의지나 능력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앤은 세계를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 벌인 일들을 수습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다.


나는 어느날부터 앤의 무심한 실수들에 한숨을 내쉬면서 지켜보게 됐다. 그러다 앤이 가짜장례식을 치른 뒤 배에 실려 떠내려 가는 일화에서부터 앤을 보지 않게 됐다. 그의 어머니는 혼비백산해 앤을 찾았다. 나는 굳이 그런 장난을 왜 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몰랐다. 내가 세일러문이 아니라 빨강머리 앤으로 자랄 줄은.


멋지게 변신할 줄 알고 세상을 구할만큼 능력이 출중한 세일러문은 내가 되고 싶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천방지축 사고뭉치로 자라나 부모님 심장을 졸이게 하고 얼떨결에 어른들의 속을 긁어대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지금 나는 앤에게 부끄럽다. 한심하다 여겼던 앤에게 위로를 받을 정도로 나는 앤보다 실수에 쉽게 무너졌다.


앤은 인생을 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고 예상대로 되지 않던 현실이 무섭기만 했다.


특히 직장에서는- 당찬 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아두었더라면 훨씬 나았을지도 몰라.


지금도 나는 앤의 그 근거없는 긍정이 요상하게만 느껴진다. 뒤집어 생각하는 그 상큼함이 낯선 이국의 향신료처럼 생경하기만 하다.


되짚어 보건대 앤처럼 발상할 수 있었다면 여러 실수들 앞에서 나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곰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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