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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Mar 26. 2020

왜? 1분만에 버려질 포장지를 몇 달간 디자인하는가?

단 몇 초의 미학을 위하여

치약 브랜드 담당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은박지 원단에 인쇄된 파란색 패키지가 꽤나 고급스러워서 치약의 매출은 한창 급성장 중이었고,

베리에이션 제품까지 출시하고 나니 매대 장악력도 좋아지면서 치약 매대가 온통 파란색이었다.

난 가끔씩 마트로 나가서 내가 디자인한 파란색 치약 패키지들이 팔려나가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날도 집 근처 이마트 치약 매대에서 사랑스러운 나의 치약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우연히 딸과 친한 친구 엄마를 만났다.   


딸 친구 엄마: 어! 태희 엄마 벌써 퇴근했나 봐요? 치약 사러 왔어요? 안사고 뭘 그렇게 고민해요?

나: 아~ 네.... 그게 아니고 제가 디자이너인데... 제가 한 디자인을 좀 보고 있었어요

딸 친구 엄마: 그래요? 마트에서요? 무슨 디자인을 하는데요?

나: 치약 패키지디자인이요.

딸 친구 엄마: 치약이요? 그것도 디자인을 해요?          


이 한마디가 몇 달에 걸쳐 작은 문구 하나까지 고민하면서 치약 패키지를 디자인했던 나에게는 참 충격이 컸던 기억이 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는 마트 쓰레기통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제품의 포장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는 즉시 쓰레기가 되는 포장지는 버리고 필요한 알맹이(?)만 가져간 거다.

난 도대체 뭘 디자인하고 있었던 걸까? 잠시 머리가 띵~ 했다.

남들에게는 포장지가 쓰레기로 보일지 몰라도 패키지디자이너들에게는 그게 작품이고 포트폴리오다.

내 작품이 구매 후 1분도 안돼서 모두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거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과연 제품의 패키지가 소비자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같은 음료수는 3분에서 5분? 뭐, 가끔 1분 안에 다 마시고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디자인했던 치약의 종이 박스는 1분도 안돼서 쓰레기통으로 가고, 튜브는 한 달쯤?

화장품 용기의 라벨이나 인쇄된 디자인은 그래도 꽤 여러 달 소비자와 함께 하겠지만 종이 박스는 디자인을 보는 것도 아니고 설명서만 읽고 또 5분 안에 버려지겠지?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사자마자 대부분 버려지고 소비자들조차 디자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패키지 디자인에 그토록 정성을 들이고 오랜 시간 디자인을 해야 하는 걸까?     

패키지 디자인의 가장 근본이 되면서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잠깐 짚어볼까 한다.     

마케팅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MOT(Moment of Truth)란 말이 있다. 스페인의 투우 용어인 ‘Moment De La Verdad’를 영어로 옮긴 말인데, 투우사가 소의 급소를 찌르는 순간을 의미한다.

피하려고 해도 피해지지 않는 순간’,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중요한 순간으로 소비자가 매대에서 제품의 패키지디자인을 만나는 순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매시점인 FMOT(First Moment of Truth)에 해당한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첫 번째 진실의 순간'인 셈이다.

고 관여 제품이 아닌 경우 소비자의 구매 결정은 길게는 10초, 짧게는 3초 안에 결정이 된다는 말이 있다.

패키지디자인은 3초는 아니더라도 단 몇 초의 미학인 셈이다.

소비자는 몇 초 안에 구매 제품을 이미 정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시간으로 보낸다고 하니, 1분 안에 포장지를 버리든 3분 안에 버리든 그건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제 왜? 사자마자 버려지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는 패키지디자인에 그토록 공을 들여야 하는지 감이 좀 잡혔을 꺼라 생각한다.

물론 패키지 디자인은 이 이외에도 이동시 내용물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적재를 용이하게 해야 하는 등 중요한 사항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20여 년의 내 경험에 의하면,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바로 FMOT 관점에서의 패키지디자인의 역할을 말하고 싶다.


"내 제품을 처음 본 소비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3초 안에 소비자의 발목을 잡을 디자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패키지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답을 찾아야 하는 핵심 포인트다.

이 포인트 하나만 잘 기억하고 있어도 우리가 디자인을 하면서 했던 사소한 고민들은 1분 안에 해결 가능하다.

예를 들면, 제품 관련 정보의 크기라든지 중요한 문구들의 위치 같은 것들 말이다.

제품을 들고 한참을 보고 있어도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무엇이 들어있는지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면 당장 그 패키지의 디자인은 수정할 것을 추천한다.

소비자의 눈은 단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이미 다른 제품으로 옮겨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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