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가 없는 별들의 전쟁
디자인팀과 마케팅팀 모두에서 근무를 해보니 회사 내에서 패키지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마케터인 것 같았다.
마케터가 주는 ‘신제품 개발계획서’에 따라 디자이너가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회사나 마케터와 디자이너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패키지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입만 열면 청산유수처럼 브랜드 자랑을 해대는 마케터의 말만 믿고 디자인을 진행했다가 제품 개발이 취소돼서 헛수고가 되는 걸 경험한 적이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또는, 별 시답지 않은 제품을 가져와 하도 들이대니 못 이기는 척 먼저 디자인을 해준 것이 대박을 터뜨려서 나까지 어깨가 으쓱해진 경험도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마케터의 현란한 말솜씨가 신뢰를 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디자이너들에게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케터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다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마케터들은 말을 잘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브랜드를 지키고 키워야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흐름이나 경쟁상황, 소비자들의 라이프 스타일 분석, 사회적 이슈나 트렌드 조사 등을 통해 자신만의 논리로 무장하고, 자신의 브랜드에 투자를 받기 위해 회사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압박한다.
소비자 리서치를 통해 객관성을 높이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나이가 많으신 임원 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의 스킬까지 키운다.
세탁세제 파트에는 6명의 BM(Brand Manager)들이 있었고 6개의 브랜드들이 있었다.
그 해의 매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평생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할 만큼의 큰돈이 우리 팀에게 있었지만, BM들과 회의를 마치고 난후, 나는 마케팅 비용을 증액하지 않으면 매출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꺼라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BM들은 정말 치열하고 집요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펴서 나에게 마케팅비용을 요구했고 그들은 내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일종의 승리감 같은걸 느끼는 듯했다.
물론, 그 해의 마케팅 비용은 증액되지 않았고 우리 팀은 다행히도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신규 브랜드는 신규 브랜드대로, 잘 팔리는 브랜드는 잘 팔리는 브랜드대로, 안 팔리는 브랜드는 또 그 브랜드 나름의 비용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그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회사에서 비용을 받아내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비자를 설득해서 그들의 지갑을 열어 브랜드를 키워내는 것이 마케터의 업이고 일이다.
회사의 설득을 마치고 주머니까지 두둑해진, 어깨에 힘이 잔뜩 실린 마케터가 유관부서를 설득하고 움직이는 건 어쩌면 일도 아니다.
이런 마케터들과 디자이너가 논리싸움을 하는 건 참 어리석은, 누가 봐도 지는 게임이라는 걸 디자이너들은 자주 잊어버린다.
내가 디자인팀장으로 일할 때 우리 팀의 여자 팀원들도 가끔씩 마케팅과 논쟁 후 화장실에서 울곤 했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감성적이다. 아니, 감성적이지 않은 디자이너는 없다.
패키지디자이너를 비롯한 모든 디자이너들은 말이나 글 대신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좋아서 디자이너가 된 거니까 너무나 당연하다.
마케터가 일을 할 때 논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디자이너는 감각을 키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전시회를 다니고, 책을 읽고,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보고, 여행도 다닌다.
자신이 보고 느낀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기도 하고, 새로운 이미지와 결합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내야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건 디자이너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다른 직원들 눈에는 신선놀음처럼 보이겠지만, 디자이너들에게는 이것이 일이고 능력이다.
디자이너의 능력은 말이 아니라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과물 없이 말만 청상 유수로 하는 디자이너는 인정받지 못한다.
열 마디의 말보다 누가 봐도 근사한 디자인 한 장이면 게임 아웃이다.
적어도 디자이너들의 세계에선 그렇다.
한 장의 디자인을 위해 디자이너들은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머릿속의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보거나, 새로운 것들과 결합해보면서 최적의 디자인을 찾는다.
대학시절 존재감이 제로에 가까운 복학생 선배가 있었다.
같이 듣는 수업도 별로 없고, 과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아서 내 기억 속에서 조차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을 무렵, 아마도 표현기법 수업시간의 최종 과제 발표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 물감이나 에어브러시, 펜화 정도로 그린 과제를 발표했는데 그 복학생 선배가 학교에 단 한 대밖에 없었던 매킨토시 컴퓨터로 그린 작품을 발표한 것이 화제가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요즘 대학들은 디자이너들에게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시키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획서를 쓰게 하거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주는 다양한 수업을 필수로 공부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업의 성격상 말만으로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디자인)을 절대 앞설 수 없다.
이것이 디자이너가 말로 마케터를 설득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마치 마케터가 그림으로 디자이너를 이겨보겠다고 덤비는 꼴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디자이너들은 마케터가 가지지 못한 능력 하나를 가지고 있다.
바로 상상력이 그것이다.
마케터가 말로 하는 신제품 콘셉트에 대해 들으면서 디자이너는 이미 머릿속에 나오지도 않은 제품을 상상할 수가 있다.
패키지의 재질과 컬러, 브랜드 네임의 스타일과 전체 레이아웃, 그리고 패키지에 들어간 이미지에 색감까지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디자이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거다.
머릿속에서 그린 디자인을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서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 필요할 뿐.
물론 답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 제품에 관한 정보의 양이 쌓이면서 조금씩 바뀔 수는 있지만, 여전히 답을 아는 디자이너에게 답을 모르는 마케터의 조언이나 의견은 공허할 뿐이다.
이런 디자이너들에게 마케터가 말로 이겨보려고 하는 건 참 어리석은, 누가 봐도 지는 게임이라는 걸 마케터들도 또 자주 잊어버린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패키지디자인 업무의 특성상 마케터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자.
마케터 역시 디자인은 마케팅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경쟁력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승자가 없는 전쟁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