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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Mar 30. 2020

나의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샴푸와 참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나는 매년 돌아오는 2번의 명절, 즉 추석과 설날에 판매하는 생활용품 선물세트의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제품 개발 전에는 항상 여러 부서가 모여서 회의를 했었는데, 언젠가 그 해에는 첫 회의부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실무자 회의에 영업 상무님께서 참석하셨고 오프닝 멘트까지 장시간 하시니, 상무님께서 나가신 후 한동안 회의실은 침묵이 흘렀다.

말씀의 요점은, 올해는 불황이라 영업도 힘들 것 같으니 선물세트 개발을 특별히 신경 써서 잘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셨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모두들 머릿속이 명쾌하지가 않은 듯 보였다.

‘지금까지는 선물세트를 신경도 쓰지 않고 잘 못 만들었다는 말씀인가?

어떻게 잘 만들어 달라는 얘기지? 뭐가 문제일까?’

뭐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어떻게 잘 만들 것인지는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너무 막연했다.

마케팅팀에서는 선물세트에 추가 비용을 투입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이 말은 개발부서들에게 개발비를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는 말이었고, 이건 필시 디자이너인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선물세트에 들어가는 용기며 하다못해 뚜껑 하나도 신규 개발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말과 같았다.

그렇잖아도 용기를 새로 디자인하자고 하려던 나의 말은 시작도하기 전에 이미 상황 종료다.

브랜드 파워도 약하고 개발비도 없이 어떻게 매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마법 같은 디자인은 뭘까?

올해도 매출을 성장시키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힘이 빠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2차 회의가 소집되었고 난 그 회의에서 참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명절이어도 불황이 오면, 사람들은 고가의 선물세트보다는 값이 저렴한  선물을 많이 하는데 대표적인 품목이 생활용품 선물세트와 참치 선물세트라는 내용이 뉴스에 나왔다며 모두들 표정이 밝았다.

생활용품 선물세트에는 보통 샴푸와 치약, 비누들이 들어있는데 그중 소비자들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품목은 샴푸다. 결국 샴푸와 참치의 싸움인 거다.

난 다시 흥미가 생겼다. 

나보다 강한 샴푸 브랜드들을 어떻게 이길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뜻밖에도 참치와의 싸움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참치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참치는 서민들의 대중적인 먹거리고, 불황에는 역시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머리 한번 덜 감고 배불리 먹자고 생각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시할 수 없는 경쟁상대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샴푸가 참치와 싸워야 하다니....     

패키지 디자인을 시작할 때 대부분은 같은 카테고리의 제품들 중 브랜드파워가 좋아 인지도가 높거나나의 디자인보다 더 눈에 띄어서 내가 팔리는 걸 방해하는 브랜드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그 회사 제품보다 더 튀고더 예쁘고 더 커 보이게 디자인하려고 노력한다.

지금 난 이것이 어쩌면 지금까지의 디자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함정과도 같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인 샴푸와 참치의 싸움은 어쩌면 당연하다.

나조차도 주말에 일식집에서 외식을 할까중국집에서 외식을 할까고민하다가 딸이 좋아하는 동물원에나 가자고 생각을 바꾼 적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식당들의 경쟁상대가 뜻하지 않게 동물원이 된 케이스인데 의외로 흔한 경우이다.     

난 머릿속이 좀 유연 해지는 걸 느꼈고,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왜? 선물을 하는가?

생활용품이나 참치 같은 저렴한 선물은 마음의 표현이고정이다.

나는 매년 우리 회사의 생활용품 선물세트로 주변에 선물을 했지만 늘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고마워, 뭐 이런 걸 다...."

생활용품 선물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그 이후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식품을 선물 받으면 이렇게 해 먹으니 맛나더라, 신선하더라 이런 대화가 이어지고, 주방용품을 선물로 받으면 튼튼하더라 사용하기 편하더라 뭐 이런 대화가 이어지고, 하다못해 양말 한 세트를 받아도 색이 좋다는 둥, 땀 흡수를 잘한다는 둥 이런 대화를 이어가는데, 생활용품 선물세트는 한 번도 그 샴푸 향이 좋더라 머릿결이 부드럽더라 하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평상시에도 마트에 가면 늘 파는 제품이고, 처음 써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흔해서 별 감동이 없는 선물이라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 부분은 모르긴 몰라도 참치 선물세트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같은 값이지만 참치 세트를 선물하는 것보다는 좀 더 신경 쓴 선물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선물세트에 감동을 담자.'

그래서 감동이 담긴 선물세트라는 큰 방향을 정하고 '명화의 감동을 함께 전하는 생활용품 선물세트'라는 콘셉트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해 매출은 성장으로 마감했고,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그 회사는 명화 선물세트를 유지하고 있으며, 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였다.     

패키지 디자인은 경쟁상대를 바로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생각해보자.

나의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그리고 마케터에게도 질문을 던지자.

우리의 경쟁상대는 이 제품이 맞나요?’     

[명화의 감동을 담은 고흐 선물세트 패키지 디자인]
[명화의 감동을 담은 고흐 선물세트 패키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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