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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Mar 25. 2020

넘어진 김에 쉬어가지 말고,
디자인에 날을 세우자

시간은 칼날을 무디게 만들고, 무딘 칼로는 아무것도 썰지 못한다

아차! 하는 순간 넘어진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픔보다 창피한 마음에 다시 벌떡 일어나고 싶지만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한동안 치료를 위해 쉬어야 한다.

나를 넘어뜨린 돌부리를 원망하거나, 넘어진 나를 질책하는 건 어리석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지만,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무시한다고 해도 쉬기만 하기엔 어쩐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이다간 더 큰 낭패를 당할까 봐 조심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상황에 놓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땐 잠시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좀 더 긴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가던 나에게 이건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동안 계속 쓰기만 해서 무뎌진 나의 칼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말이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한 번도 음식을 하신 적은 없었지만,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는 많은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 어머니를 위해 항상 진한 회색 숫돌을 꺼내서 칼을 갈아주셨다.

어린 마음에 그 회색 숫돌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쇠로 만든 칼을 쓱쓱 갈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쩐지 든든하기까지 했었다.

어머니는 그 칼 하나면 천하무적이 되신다.

단단한 무도 가늘게 채를 썰어 나물을 무치시고, 질긴 고기도 잘게 다져서 동그랑땡을 만드시고, 부서지기 쉬운 생선을 얇게 포를 떠서 생선전을 부치기도 하신다.

가늘게, 잘게, 그리고 얇게 써는 일은 칼날이 무디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명절 준비처럼 매년 반복되는, 예상 가능한 일들만 있다면 인생이 참 어려울 게 없겠지만, 아무리 준비성 좋은 사람도정말 일을 잘하는 사람도 가끔 예상치 못한 돌부리를 만나 좌절하기도 하고때로는 슬럼프에 빠져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돌부리를 보며 이를 갈거나 넘어진 나를 자책해봐야 이미 벌어진 일이고 시간 낭비다.

야속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자.

나를 넘어뜨린 돌부리가 경쟁자이든, 자기 계발이든, 건강이든, 가족이든, 혹은 천재지변 일지라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단기간에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음 돌부리를 만났을 때는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혹시 다시 걸려 넘어졌다 해도 다치지 않도록 더 강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 내가 입은 몸의 상처는 아물게 해 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은 오히려 더 약해지고 내 칼날도 점점 무뎌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스럽게 나의 칼을 꺼내서 숫돌 위에 대고 물을 조금씩 뿌리며 천천히 날을 세워보자.

날이 세워지고 칼이 점점 날카로워질수록 자신감도 살아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칼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실력이다. 그리고 칼을 가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될까?

상황의 문제든, 돈의 문제든, 아니면 실력이 부족해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나도 그렇게 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이너도 자신만의 철학이 필요하다. 문제는 나의 디자인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잘 드는 칼날을 빨리 갖는 것이다.

머지않아 날이 선 칼로 누구보다 가늘게, 잘게, 그리고 얇게 써는 나만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날은 반드시 올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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