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세그멘테이션이 주는 특별한 선물
내가 만났던 능력 있는 마케터들은 말도 잘하고 콘셉트도 잘 잡았지만, 무엇보다도 마켓 세그멘테이션(Segmentation)에 능했다.
내가 출시할 신제품이 세계 특허를 받았다든지, 세상에 없는 신약을 개발했다든지, 특별한 발명품으로 시장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 카테고리의 대명사가 되는 브랜드를 개발하는 거라면 좋겠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남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할지, 틈새시장은 없는지 마케터들이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과연 어떤 소비자들이 내 제품에 지갑을 열어줄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크다.
아무리 남들과 차별화가 잘 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에 없는 기막힌 틈새시장을 찾았다고 해도, 결국 내 제품을 사주고 좋아해 주는 고객이 있어야하기 때문에 마케터들 역시 시장 세분화라고 하는 마켓 세그멘테이션 전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날짜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몇 년 전 마케터로부터 신기한 신제품 개발계획서 한 장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신규 화장품 출시를 위한 신제품 개발 계획서였는데, 소비자 타깃 부분이 참 신선했다.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20대들의 타고난 도자기 피부를 동경하는 30~40대 여성' 정도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굴에 잡티도 좀 있고, 얼굴에서 가리고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중년 여성이 타깃이라는 설명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건 참 드문 경우라 의아했다.
기초화장품도 아니고 색조화장품이 소비자 타깃을 화려한 메이크업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인 20대 해비 유저(Heavy Uaser)로 잡지 않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케터에게 미팅을 요청했고, 난 그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가 있었다.
신규 개발할 제품은 색조화장품 중에서도 팩트타입의 파운데이션제품이었는데, 현재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경쟁사(우리만 경쟁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조차 몰랐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의 약점이 커버력이 약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피부가 깨끗한 젊인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커버가 되는 생얼 같은 BB팩트 제품을 선호하지만, 얼굴에 가릴 것이 점점 많아지는 30대 중반 이상이 되면 잡티 커버가 되지 않으니 커버 제품을 추가로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30대가 되면서부터 피부의 노화와 주름 방지를 위해 피부보습이 중요한데 우리 제품은 에센스의 함량을 높인 제품이라는 거였다.
커버력이 좋으면서도 충분한 피부보습과 타고난 피부처럼 얇고 자연스러운 화장을 할 수 있어 30~40대 여성들에게 특히 적합하다고 했다. 그래서 제품명도 ‘에센스 팩트’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럴듯했고, 이제는 타깃에 맞는 디자인이 더 고민이었다.
30대는 그렇다 치고, 40대 중년 여성들을 위한 디자인은 20대를 위한 제품디자인과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까?
40대 이상의 중년층이 되면 20대 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저렴한 제품을 자주 구입하는 것보다는, 좀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구입해서 오래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우리는 메인 판매 채널이 홈쇼핑 채널이고, 경쟁사보다 가격도 저렴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한껏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하는 건가? 원가 부담은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게 많았지만, 늘 그렇듯이 일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것과 시안 작업을 병행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최단기간에 디자인을 완료했던 사례로 남아있다.
그리고 최종 디자인 콘셉트는 이러했다.
회의시간에 이 제품은 홈쇼핑이 메인채널이라서 30대보다는 40대 여성들을 핵심 타깃으로 잡아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40대 여성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성들이 40대가 되면 남들의 눈치를 보기 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집중하면서 전업 주부로 살고 있든, 워킹우먼으로 살든 자신의 인생 앞에 당당해지는 시기이다.
그런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래서 그런 '40대 여성들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디자인에 담기로 했다.
제품의 컬러는 너무 튀지 않는 은은한 컬러로 하면서 제품 용기 전면에 브랜드 로고를 과감하게 가득 채웠다. 크기는 자신감과 비례한다. 자신감이 없어질 때 자신의 모습이 작아진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름 없는 브랜드라고 제품 한쪽 구석에 보일 듯 말듯하게 로고를 쓰고 싶지 않았다.
우리 타깃 소비자들은 명품이 아니더라도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제품을 꺼내 얼굴을 두드리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감 넘치게 말할 거라 믿었다.
"아직도 이 제품을 모르세요? 이 제품이 요즘 인기에요" 라고 말이다.
그런 당당함을 콘셉트로 에센스 팩트의 디자인을 시작했다.
에센스 팩트는 독특한 제형과 탁월한 품질, 그리고 좋은 디자인 덕분에 많은 중년층 여성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제품의 모델 겸 쇼핑호스트였던 견미리 씨의 자신감 넘치는 입담 덕분에 홈쇼핑에서는 완판 신화를 이어갔으며, 우리는 6개월에 한 번씩 시즌이 바뀔 때마다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을 개발하느라 또 바쁘게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에센스 팩트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견미리 팩트, 완판 팩트, 인생 팩트 등 다양한 별명이 생겼고, 우리는 40대 여성들에게 다시 빛나는 20살 피부를 선물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마케팅으로부터 또 하나의 신기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40대들을 위해 만든 에센스 팩트를 20대들이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색조 화장품의 경우는 보통 20대 여성들이 센스 있게 화장도 잘하고 피부도 고와서 그들이 쓰는 제품을 중년층에서 따라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대의 경우는 흔하지 않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홈쇼핑에서 제품을 구입한 40대 엄마들이 20대 딸에게 사용해보라고 권하고, 딸들이 다시 친구들한테 입소문을 내면서 의도치 않게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제품이 되었고, 자발적으로 고객층이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20대의 피부가 모두 잡티 없이 좋다는 것 역시 편견이었다. 그들도 여드름 자국이나, 피부 잡티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케팅에서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에센스 팩트에는 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모녀 팩트'라는 별명이 하나 더 생기면서 더 많이 팔리는 제품이 되었다.
이거야 말로 훌륭한 마켓 세그멘테이션 전략이 주는 특별한 선물인 셈이다.
내 고객이 누구인지를 정하는 건, 어쩌면 제품을 만드는 내가 아니라 제품을 쓰는 고객 인지도 모르겠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주기적으로 나의 고객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길 바란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꽤 많은 고객들이 내 제품을 사주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의도치 않았던 고객들을 발견하는 즉시 디자인으로든, 광고에서든, 작은 문구 하나라도 활용해서 꼭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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