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인가? 창의성인가?
어느 날인가 아침 일찍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내 자리에 이미 설계팀 팀장님이 와계셨다.
늘 그렇듯이 그분은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나를 맞아주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어디서 받으셨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빈 용기들을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새로 개발된 프리몰드(공용 용기)인데 너무 예쁘게 잘 나와서 보여주려고 가져오셨단다.
설계팀 팀장님께서 예쁜 용기라고 말씀하시는 건 딱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용기이다.
잘 쓰러지지 않게 밑면이 넓고 높이가 낮아 생산성 좋은 사각형 용기 이거나 사각형에 가까운 용기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꼭 이 용기로 디자인해달라는 건 아니고, 참고하라고. 효율성보다는 크리에이티브가 우선이지."
하지만, 나는 안다.
그분이 왜? 아침 일찍부터 이 용기들을 손수 나에게 가져다주셨는지 말이다.
분명 누군가로부터 용기가 자꾸 쓰러져서 생산성이 떨어진다. 내지는 용기 형태가 비대칭이라 스티커 붙이기가 힘들다. 등등의 클레임을 받으셨을 게 뻔했다.
하지만, 제품이 팔려야 생산 효율성도 있고, 로스율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꿈(?)을 강요하신 적이 없다.
난 그날도 하루 종일 설계팀 팀장님이 주신 사각형 용기들을 보고 또 봤지만 당최 어떤 제품에 어떻게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없었다.
일차 문제는 용기가 사각형이 되면 매장에서 경쟁사 제품에 비해 작아 보인다는 거다.
아무리 용량을 크게 표시해도 소비자들은 같은 용량이라도 커 보이는 용기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키가 작은 용기들은 매대에 설치된 바 때문에 제품이 반은 가려져서 어떤 때는 제품명조차 읽기가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품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전면 면적이 너무 작아져서 디자인이 잘 안 보인다는 것도 큰 이유이다.
난 설계팀 팀장님께는 죄송하지만, 또다시 그 용기들을 살며시 책상 아래로 치웠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가져다주셨던 사각형 용기 몇 개가 아직도 책상 아래에 있었다.
다자인에서 중요한 건 창의성인가? 효율성인가? 하는 문제는 디자인이란 용어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논의되었던 뿌리 깊은 이슈이다. 어쩌면 산업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했던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다시 들먹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논의해도 끝이 나지 않는 문제인거다.
요즘 한국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북유럽 디자인이 대세다.
가구나 주방용품들에는 어김없이 북유럽 풍 디자인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좁은 집에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북유럽 가구들을 보면 북유럽 디자인의 진수를 볼 수 있으며, 나도 이렇게 효율성이 극대화된 북유럽 디자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지만 북유럽에서조차도 샴푸나 바디워시 같은 생활용품들의 디자인은 효율성보다 창의성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의 사이즈도 작고, 가구처럼 효율성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라는 부분은 디자이너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여서 늘 고민스럽다.
그래서 효율성으로 평가받는 엔지니어들과 창의성으로 평가받는 디자이너들은 항상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제품의 효율성을 무시하지 않고, 디자인 콘셉트를 잘 구현하는 수준에서 합의를 이룬 외나무다리 어딘가에 서로의 변치 않는 마음을 약속하는 단단한 자물쇠를 채워야만 한다.
여기서 누구 하나라도 마음이 약해지면 디자이너는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생산해야 하는 10만 원짜리 샴푸를 만들고, 엔지니어는 초스피드로 생산된 네모난 용기들을 창고 가득 쌓아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요즘처럼 인터넷 쇼핑이 오프라인 시장을 위협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굳이 커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튀는 디자인보다는 진정성 있는 디자인으로 설계팀 팀장님의 꿈을 이루어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네모의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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