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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13. 2020

선행(先行) 디자인
선행(善行) 디자인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빨리 잡아먹힌다?

처음 패키지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난 디자인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가끔 혼자 회사에 남아 밤을 새우며 디자인을 하곤 했고, 자주 좌석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가기도 했었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그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제품의 컬러나 서체, 레이아웃에 따라 마법처럼 변하는 디자인이 마냥 신기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한 가지에 깊이 빠져 몰입한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 디자인이 제품이 된다는 것도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디자인한 제품이 출시되면 꼭 매장에 제품을 보러 갔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제품의 먼지를 닦고, 쓰러지면 똑바로 세워놓고, 또 자주 사와서 주변에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패키지디자인은 이처럼 제품화돼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재미가 있다.

카레 패키지를 디자인한 적이 있었는데, 제품이 출시되고 한 달 내내 카레만 먹었다.

집에서 가족들한테도 만들어 주고, 순한 맛, 약간 매운맛, 매운맛을 하나씩 먹어보기도 하고, 들어가는 야채들을 바꾸거나 밥 대신 국수랑 같이 먹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나만의 방법으로 한 달간 먹고 나니 노란색만 봐도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디자인한 수프가 출시되었고 난 수프로 갈아탔다.     

그로부터 5년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기에는 경력이 좀 부족했지만 그래도 디자인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생각했다.

디자인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영업방법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선행(先行)디자인 영업이었다.

그 당시 내 눈에는 디자인을 조금만 바꾸면 매출이 잘 나올 것 같은 제품들이 꽤 보였다.

마트를 돌며 그런 제품들을 골라 선행으로 디자인을 해서 기업에 제안서를 넣는 방식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요청을 받아 디자인을 하면 고려할 사항도 많고제약도 많아 디자인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선행으로 제안하는 디자인은 당연히 더 창의적이고 독특해서 관심을 끌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처럼 누구보다 한발 먼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좋은 디자인을 제안하면 당연히 잘 먹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초보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는 새가 아니라 어쩌면 새가 잡아먹는 벌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면 그만큼 빨리 잡아먹히는 존재.     

그게 싫어서 기업체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적어도 내 아이디어가 잡아먹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또 열심히 디자인에 빠져들었다.

디자인팀의 팀장이 된 이후 나의 선행디자인 욕심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디자이너에게는 특히 욕심이 나는 제품이 있다. 디자이너의 직감이라고 할까?

특별한 마케팅적 콘셉트나 제품의 특이성 없이도 디자인만으로 분명히 성장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 품목들을 골라 선행디자인으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뢰한 디자인도 언제 시안을 볼 수 있냐? 왜 이렇게 늦냐? 재촉을 해야 할 판이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먼저 해 와서 짠~ 하고 보여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디자인을 채택할 건지 말 건지는 차후 문제이고 일단 디자인팀에서 먼저 스터디를 해 준 것에 대해 마케팅 담당자들도 무척 좋아했다.

선행(善行)으로 시작한 선행디자인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우리 입장에서도 전체 스케줄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면서 예전보다 일정관리에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들이 그 누구의 조언이나 지시에 흔들리지 않고마음껏 자신의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디자인을 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공이 많은 배는 산으로 가고조언자가 많은 브랜드는 산고의 고통은 물론태어나서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을 모두 피할 수 있는 선행디자인이야말로 윈윈 프로젝트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무렵 나는 또다시 내가 새인지 벌레인지 헷갈리는 상황과 마주했다.

선행디자인을 시작한 지 일 년쯤 지났을까? 점점 선행으로 디자인해야 하는 품목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다른 마케터들도 모두 선행 디자인을 요구했다. 선행으로 디자인을 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하는 마케터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마케팅이 콘셉트를 잡기 전 선행으로 디자인을 먼저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마주하고 보니 나는 또다시 일찍 일어난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디자인만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품목이 있고 반드시 제품의 성능이나 독특한 마케팅 콘셉트로 승부해야 하는 제품이 있는 것이다.

제품의 성능과 독특한 콘셉트로 승부해야 하는 제품은 선행디자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그들에게 누차 설명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서운한 눈빛이었다.     

디자이너들도 선행 디자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난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그 누구도 남들보다 더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렇지만 난 여전히 디자이너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주는 선행디자인 프로젝트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프로젝트가 디자이너를 더 크게더 빨리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선행 디자인이 일찍 일어나 벌레를 잡는 새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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