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숨겨진 진실들
회사 입사 후 처음 해외시장조사를 갔던 때가 생각난다.
일본 도쿄였는데, 난 마트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핸드폰의 카메라 성능이 별로라서 시장조사를 위해 새로 산 디지털카메라였다.
카메라는 물론 며칠 동안 시장 조사를 하며 찍은 사진들까지 몽땅 잃어버린 거다.
다행히 마트를 나와 지하철을 타기 직전에 카메라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고, 허겁지겁 매장이 문 닫기 전에 마트에 도착해서 카메라를 찾을 수가 있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시장조사고 뭐고 카메라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도 잘 모르고 지하철티켓 사는 것조차 만만치가 않았다.
하루 세끼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큰 과제였다.
선배들이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추천해주고 좋은 식당들을 알려줬는데, 분명 회사에 가면 뭘 먹었냐?, 내가 추천해준 맛 집은 가봤냐? 이런저런 질문을 할 게 뻔했다.
생각 같아선 간단하게 편의점 도시락 같은 걸로 때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렇게 먹는 문제까지 하나하나 신경 쓸게 많다 보니 시장조사에만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었던 첫 해외시장조사였다.
그 이후로 좀 나아질 것 같지만, 해마다 시장조사 장소가 바뀌니 또 마찬가지다.
도쿄에서 헤매던 걸 런던이나 파리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물론 요즘엔 구글맵 덕분에 길 찾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운 좋게 같은 장소를 몇 번 더 가게 되면 좀 나아지긴 했다.
해외 시장조사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선진 시장들을 배워서 미래의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디자이너들에게도 글로벌한 시장과 디자인 트렌드를 읽고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겨우 며칠 동안 마트 몇 곳과 디자인샵을 보는 것만으로 과연 시장의 흐름과 디자인 트렌드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거다.
난 코펜하겐에 3년간 살면서도, 20여 년간 디자이너와 마케터로 일한 경력이 있었는데도 덴마크 디자인의 트렌드와 시장의 흐름을 다 읽지 못했다.
그런데 단 며칠만으로 시장을 읽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제품과 디자인, 그리고 먹거리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기후, 그리고 철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고, 사전조사 없이 가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북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바이킹의 후손들이다.
그들에게는 라곰(Lagom)이라는 그들만의 철학이 있다.
자신보다는 자신이 속한 팀이나 사회와 조화롭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더 갖고 싶어도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면서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그들만의 문화이기도 하다.
이런 그들의 철학을 이해하고 북유럽 제품과 디자인을 보면 이해가 훨씬 쉽다.
디자인에서 불필요한, 과한 장식을 배제하는 심플한 디자인 트렌드가 북유럽 디자인으로 정착된 것도 라곰의 정신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덴마크는 일 년 중 6개월은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든 날씨다.
추운 건 그렇다 쳐도 비바람 때문에 몸도 가누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휘게 문화가 발달하였다.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장시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집의 거실이기 때문에 유난히 거실 가구와 의자, 그리고 실내 장식품들의 디자인이 잘 발달하였다.
이런 배경들을 모른 채 그들의 디자인을 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감동도 없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마케터의 경우도 단 며칠 동안의 시장조사로 시장을 알기가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꼭 사장님께 출장 보고를 하던 때가 있었다.
사장님을 비롯한 회사의 임원 분들에게 해외 시장조사를 다녀온 후 조사한 내용들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한 번은 출장 보고가 길어지자 사장님께서 제안을 하셨다.
인터넷 서칭을 통해 알 수 있는 제품 소개 말고 현장에서 보고 느낀 시장에 관한 내용을 위주로 보고해달라는 말씀이셨다.
잠시 회의실은 침묵이 흘렀고, 열심히 제품 소개만 하던 마케터는 더 이상 발표를 이어가지 못했다.
시장조사를 하러 갔는데 시장은 보지 못하고 제품만 보고 왔으니 시장의 흐름을 알리가 없었다.
신제품의 출시 배경은 물론 시장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깊이 있는 조사가 되었을 리도 없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본 시장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시장의 변화와 트렌드를 즉석에서 읽기는 어렵다.
시장조사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제품과 시장, 소비자, 그리고 제품에 영향을 주는 그 나라의 특수성까지 미리 공부하고 현장에서는 공부한 내용을 확인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 안에 조사를 해야 하는 해외 시장조사의 특성상 아무런 지식 없이 매장에 도착하면 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세탁세제 제품의 시장조사를 위해 유럽에 갔을 때는 한국에 하나둘씩 액체세제 제품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물론 국내에서는 액체세제의 비중이 크지 않았고 매출도 미미했다.
국내 세탁세제시장에는 분말타입의 일반세제가 처음 출시된 이후, 사용량을 줄인 농축 분말세제가 장악하고 있었고, 조금씩 액체세제가 출시되면서 시장이 3개의 카테고리로 세분화되어가고 있었다.
일반 분말세제를 사용하는 소비자와 농축분말을 구매하는 소비자, 그리고 액체세제를 좋아하는 소비자는 미세하게 달랐다.
그리고 해외 브랜드들에서도 액체류의 세제들이 심심치 않게 출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액체세제가 단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궁금했고, 우리는 신제품의 콘셉트를 잡기 위해 해외 시장조사에 나섰다.
해외 시장조사 전에 소비자는 물론 해외제품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시장조사에 착수했었다.
가장 먼저 영국에 도착했고, 대형마트의 세탁세제 매대 앞에 선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한눈에 보였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의 매대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세탁세제 매대는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있었고, 반은 분말세제이고 나머지 반은 액체세제였다.
분말세제가 일반과 농축의 개념이 없어지면서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고 액체세제 시장이 또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액체세제는 소비자들의 니즈가 반영된 저자극과 환경 친화적이라는 부분을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기존 분말 세제들이 강력한 세척력을 강조하던 것과는 각이 많이 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카테고리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은 세탁 보조제 시장이었다.
부분 얼룩제거제나 표백제, 그리고 세탁 부스터 같은 제품들이었는데 이것 역시 액체세제의 세척력이 약한 부분을 도와줄 세탁보조제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10년 전의 일이라서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때의 해외시장조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세탁세제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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