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만이 할 수 있는 디자인 최적화
회사를 성장시키는 건 늘 어렵다.
재작년엔 매출은 늘었는데 손익이 좋지 않았다고 했고, 작년엔 신제품이 성과를 못 내서 매출성장도 못하고 손익도 좋지 않았는데, 올해는 불황이란다. 회사의 노력과 관계없이 뜻하지 않은 경영환경의 악화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들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어려움과 위기에 대비하는 걸 게을리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회사나 매년 운영되는 TFT(Task Force Team)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원가절감이다. 회사에는 꼭 필요한 활동이지만, 디자이너들이 관심을 갖기는 참 힘든 주제이기도 하다.
본래 군사용어로 쓰인 Task Force는 특정 임무나 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잠정적, 혹은 임시로 편성한 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언젠가는 팀장님이 원가절감 TF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더니 자꾸만 내 자리를 기웃거리신다.
이미 디자인이 끝난 제품을 보자고 하시거나, 디테일한 인쇄 과정이나 재질들을 물어보시기도 하셨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자세히 말씀을 드렸는데, 자꾸 나의 사소한 업무까지 깊이깊이 들어오시기도 하고, 가끔은 일거리도 주셨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내 디자인에 원가 절감의 잣대를 들이대시는지 좀 불만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미 바쁜데 추가적인 일을 자꾸 해야 한다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직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회사의 위기나 원가절감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도대체 일을 하라는 얘기야, 말라는 얘기야’ 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때 난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자린고비처럼 파리의 똥구멍도 빨아야 하는 거야?
이미 최소의 비용으로 제품을 디자인하고 있는데 도대체 절감할 데가 어디 있다고...'
디자인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비용이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원가절감을 하면 디자인 퀄리티가 나빠지는 건 불 보듯 뻔하다고 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경력이 쌓이면서 원가절감이라는 용어에 대한 나의 시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른 수건을 짜고 또 짜야하는 원가절감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데 지켜지지 않은 것들, 혹은 노하우가 부족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경력이 쌓이고 노하우가 생기면서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찾아보면 개선해야할 포인트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 퀄리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원가와 함께 디자인사양을 최적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도 같았다.
특히 그 당시 내가 담당하고 있었던 브랜드는 생산하는 물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디자인최적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난 원가절감보다는 디자인최적화로 방향을 잡으면서 디자인했던 제품의 재질부터 인쇄, 후가공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원가절감이 아닌, 디자인 퀄리티와 원가의 최적화를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자세히 따지다 보니 빈틈이 보였다.
디자인한 제품을 인쇄할 때 6도 인쇄기에서 6가지 컬러가 한 번에 인쇄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인쇄기계의 6도 중 1도는 코팅을 위해 사용되므로 쓸 수가 없었고 결국 5도로 디자인을 해야 한 번에 인쇄가 되는 거였고 내 디자인은 남은 1도의 컬러 때문에 계속 두 번씩 기계를 돌려야만 제품 하나가 인쇄되는 비효율의 디자인이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2번 인쇄를 하면 인쇄 핀트를 맞추기도 힘들어서 오히려 디자인 퀄리티가 더 나빠질 수 있으며, 환경에 부담을 주는 건 물론이고 양산 시간도 많이 걸리니 말이다.
6도 인쇄물을 5도로 만들어 주는 건 어렵지 않았고, 디자인 퀄리티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수정에 들어갔다.
그때 이후로 제품의 디자인 퀄리티 뿐만 아니라 원가나 디자인 프로세스의 최적화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은 튜브제품을 인쇄하는데 로스율이 20%가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
자세히 보니 둥근 튜브가 한 바퀴 돌면서 인쇄가 되는데, 하단의 배경 컬러가 만나는 부분이 어긋나서 생기는 로스였다.
그래서 만나는 부분의 배경이 서로 떨어지게 디자인을 수정했고, 이 정도의 수정 역시 디자인 퀄리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으며, 로스율은 3%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디자이너는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에서의 구현 가능한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디자인은 양산에도 최적화되어있어 현장대응력을 높여준다.
인쇄소의 기계 사양이나 후가공 절차, 인쇄 방식에 따른 결과물의 차이, 그리고 소요 시간이나 비용에 관한 문제까지 디테일하게 알고 있으면 디자인 최적화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 화면은 빛이 만들어 낸 컬러이기 때문에 잉크로 인쇄했을 때, 색을 100% 동일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패키지 디자인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평면에서 디테일하게 디자인을 해도 샘플을 만들어 입체물로 확인해보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한 제품의 1차 양산이 완료되면 양산 데이터들을 기준으로 디자인을 최적화시키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것이 좋다.
양산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인쇄도수나 원고에 변화가 필요한지, 필요 이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간 부분은 없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이다.
나의 무지 때문에 인쇄소의 기장님은 6도 중 5도를 공회전을 시키면서 1도 인쇄를 추가로 하고 계셨고,
튜브 인쇄소 사장님께서는 100개 중에 20개 이상을 납품하지 못해서 더 오랜 시간 동안 기계를 돌리며 튜브 인쇄를 하셔야만 했다.
이런 협력업체의 수고는 고스란히 우리 제품의 원가에 반영되고, 결국 제품 구입 시 소비자들이 부담하게 되는 소비자가를 야금야금 올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 최적화를 할 수 있는 건 디자인을 직접 한 디자이너뿐이다.
다른 부서에서는 알 수도 없을뿐더러 협력업체에서는 알고 있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린고비의 간장에 빨대를 꽂는 이런 비효율의 파리들은 빨리 없애는 것이 답이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의 똥구멍을 빨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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