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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08. 2020

디자이너의 꿈, 향기를 디자인하다

향기를 담는 가장 멋진 방법을 찾았다

디자이너들에게는 꿈이 있다.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은 꿈,

그럴 대상을 찾아 함께 날고 싶은 꿈.

내가 식품 패키지디자인을 하고 있을 때에는 식품 디자이너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제품은 술이라고 생각했었다.

술을 디자인하는 꿈 말이다.

기왕이면 고가의 와인이나 유서 깊은 전통을 담고 있는 프리미엄급의 술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디자인 책이든 매장에서든 고급스러운 술 제품이 있으면 꼭 찾아서 디자인을 감상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한자리에 서서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었다. 마치 전시장에서 명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대리만족처럼 술 디자인을 보고 있으면, 나도 원하는 재질의 종이를 마음껏 쓰고, 평상시엔 비싸서 벌벌 떠는 금박에 실크인쇄까지 팍팍 찍어서 디자인을 하고 나면 십 년쯤 묵은 체증이 확 풀릴 것만 같았다.     

패키지 디자인 중에는 원가에 자유로운 제품은 거의 없다.

스티커에 금박을 한번 박으려면 팀장님 설득에 마케팅 설득에 사장님까지 설득해야하니 회의 때마다 불려 가서 한 백번쯤 설명해야 하고, 그래도 결국 반짝이는 금박 대신 저렴한 금분 인쇄로 바뀐다.

금분도 햇빛에 잘 비춰보면 금색이긴 하지만, 금박이 주는 반짝임과 시선을 끄는 고급진 색감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금박을 스티커 하나에 찍는 비용이 50원 정도라고 해도 만개면 50만 원이고 십만 개면 500만 원이다. 이정도면 원가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꼴랑 몇 천 원하는 제품에 금박이 웬 말이란 말이냐.

그렇지만 술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예로부터 물장사는 최고의 이윤을 자랑했다.

따라서 술은 원가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디자이너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명 금칠한 스티커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꿈의 제품인거다.

물론 술이라고 다 같은 술은 아니지만 말이다.     

예전엔 술과 비슷하게 화장품이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저가의 화장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화장품 가격이 저렴해진 이후로는 화장품 디자인도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

원가를 짜고 또 짜야하는, 마른걸레를 짜는 어나더원 제품이 된 것이다.

샴푸나 바디워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나의 이런 마음이 너무 티가 난 걸까?

어느 날 사장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명언을 남기셨다.

"장 부장. 난 컬러플하고 화려한 서양의 명화 못지않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먹색 하나로 그림을 그리는 우리나라의 묵화도 멋지다고 생각해."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꿈을 이룰 찬스가 생겼다.

난 화장품 디자인팀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향수 디자인 의뢰가 들어온 거다.

향수 역시 고가의 술과 비슷하다.

화장품 디자인의 꽃이고, 디자이너들의 로망이며, 평생 화장품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향수를 디자인해본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그동안 나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고급진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거다.

자동차 회사에서 오감 프로젝트의 하나로 향수를 만든다고 우리 회사와의 협업을 요청했다는 거다.

자동차 회사의 향수라...

내가 생각했던 블링블링한 제품은 아니겠지만 향수는 향수다.

최소 몇 천원이 아닌 몇 만 원대는 되는 고급진 향수라는데 의미가 있다.

난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 제품도 아니고, 기존에 하던 일도 있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협업 프로젝트라 힘들고....

팀원들은 하고 싶지 않은 101가지 이유를 대며 나를 설득했지만, 난 단호했다.

이건 디자이너에게는 자주 오지 않는 기회이고 찬스이기 때문이다.

원가에 구애받지 않는 진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지지 않은가.

향기를 담는 디자인이라니....

그렇게 나의 향수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자동차회사의 철학과 아이덴티티에 대해 들으면서 어떻게 향수 제품에 그들의 이미지를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향수는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라기보다는 고객들에게 자동차회사의 열정과 정체성을 함께 보여주고 싶은 그들의 의지를 담은 제품이었다.

향수 제품의 특성상 패키지디자인보다는 용기디자인에 더 많은 정성을 들였다.

자동차의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너무 투박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부드럽지만 너무 가볍지 않은 디자인이 필요했다.

재질도 자동차에 사용되는 재질들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금속, 유리, 그리고 러버 재질들이 검토 대상이었고, 그중 자동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금속 재질로 정했다.

나는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자동차회사의 향수는 출시되었고, 세계 최고의 디자인 어워드에서 3관왕을 차지하는 쾌거까지 이루었다.

그 말이 맞았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이루는 자의 것이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면서 성장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아무리 디자인 책을 많이 읽어도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좋은 디자인들을 많이 보러 다녀도 디자이너를 성장시키는 건 일이지 글이나 그림이 아니다.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다면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어떤 일이든 가리지 말아야하며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틈틈이 꿈도 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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