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의 대화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같이 어울리던 무리 중 한 명이었는데, 7~8명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 중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흡인력 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친구였다.
같은 말도 맛깔나게 해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항상 밝은 에너지가 넘치던 친구.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을 시작으로 3학년때까지 3년을 내리 같은 반을 지냈다.
1학년 말 제2외국어를 선택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일본어를 선택하고 불어를 선택한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해 그 수를 다 모아도 한 반을 겨우 채우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
불어를 선택한 나와 이 친구는 계속 같은 반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 그 유명한 대치동 고딩이었다.
이 친구의 집은 대치동 학구열의 상징 은마아파트였고.
우리는 몇 개의 학원에도 같이 다녔던 것 같은데, 과학이었나 논술이었나. 암튼 밤이 늦도록 학원수업을 듣다가 끝나면 부모님들이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아이들을 각 집에다 내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린 강남 8학군의 중심에 있었고 나름 학교의 전교에서 노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때의 나를 추억해보면 사는 게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과거는 미화되기 때문이라 그런가?
치열하게 공부하는 속에서도 친구들과의 즐거움이 있었고 꺄르르하며 웃어대던 순간도 있었다. 여느 고등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했던 친구들은 각각 다른 대학교로 찢어졌고, 각자 저마다의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그러다가 일 년에 한두번 씩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연락통은 이 친구였다.
2학년 1학기쯤이었을까. 이 친구가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미국의 칼리지에 들어갔고, 조금 후 모두가 알 만한 서부의 좋은 대학교로 편입했다.
우리는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그 전과 같이 얼굴을 볼 기회는 잘 없었고, 연락통이 한국에 없으니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이 친구가 일 년에 한 번이나 이 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오는 때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 친구가 결혼하여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씩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런 만남의 기회도 점점 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각자의 생일 때 카톡으로 인사를 하기도 하고 인스타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댓글을 달기도 하고 아이들의 선물을 보내주기도 하며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거의 유일한 고등학교 친구였다.
코로나로 한동안 한국에 오지 못했던 이 친구가 약 2년만에 한국에 왔다.
친구는 집값 비싸고 물가도 비싼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고, 친구와 친구의 남편 모두 글로벌 빅테크기업에 다니고 있으며 꿀댕이와 비슷한 나이의 딸을 두고 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끊길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친구가 한국에 와서 만난 아는 언니의 이야기를 해 줬는데, 글쎄 너무 충격이었다.
그 이야기로 현재 대치동(을 포함한 강남) 엄마들의 교육열이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각종 매체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여 '대충 이러하겠지..'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 언니는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Y대 의대를 졸업하여 일반 병원의 모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
본인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친 남자와 중매를 통해 결혼하였고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대치동에 거주하고 있다.
부부 모두 의사라 부족함은 전혀 없으며 자녀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이 지금의 직업, 생활 수준, 삶의 여유..를 가져왔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자녀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아니 그보다 더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부부 모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다(자녀교육에 관한 의사의 일치).
첫째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학원에서 중학교 2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또 다른 학원으로, 집에 오면 복습과 예습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일과를 마치고 잠에 드는 시간은 새벽 1시쯤.
주말에는 각종 음악회, 미술관, 전시회를 다니며 예술적 소양도 키워줘야 한다.
아 참! 3종 세트도 놓쳐서는 안 된다.
3종 세트란 성장주사, 드림렌즈, 교정을 말하는데, 외적인 아름다움도 교육 못지않게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성장클리닉에서 아이의 예상 키를 측정하는데, 예상 키가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오는대로 성장호르몬 주사를, 크게 나오면 크게 나오는대로 성장억제제 투여를 고려한다. 그 언니는 정해진 시간에 딸에게 성장호르몬 주사를 놓아주는 것 같다.
드림렌즈는 수면 중 착용하는 렌즈로, 우리 때에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요즘엔 강남 아이들 사이 유행인가보다. 핸드폰을 포함한 각종 전자기기에 노출된 아이들이 혹여나 눈이 빠르게 나빠지지 않도록 시력 교정을 해 주는 건가본데, 효과가 좋은가...모르겠다.
교정이야 뭐.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뺑뺑이로 돌리면 나중에 자아가 형성될 즈음 엇나가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는데, 그러한 우려를 모두 고려하여 아이들이 2년 정도는 방황해도 크게 지장이 없도록 커리큘럼을 계획한다.
아이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는 상담이나 마사지 프로그램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 언니의 딸은 위와 같은 커리큘럼을 잘 수행하며 그 언니가 이끄는대로 따라오고 있으며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입이 떡 떡 벌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고강도의 학업에, 엇나가는 걸 고려해서 2년 정도는 방황해도 무리없게 계획을 짠다니...
친구는 자기도 그 언니 말을 들으며 너무 경악했다고, 우리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 않냐며 대치동의 학구열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나도 학생 때 공부 좀 한다하는 애였고 좋은 대학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지만, 영유(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뭔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자녀에게 그런 무자비한 생활을 하게끔 하고싶지도 않았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까지 학업에 몰두하지 않았는데도 중고등학교 시기에 상위권을 유지해서 그런가, 공부할 애들은 다 때되면 본인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닌 본인이 스스로 하는 공부가 진짜 자기 공부고, 아무 생각 없을 때 하는 공부보다 진짜 열심히 해야 할 시기에, 필요한 때에 집중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많이 뛰어놀아야 할 시기인 초등학교 때에 쥐잡듯 아이를 잡아서 앉혀놓고 억지로 공부를 시키는 것은 오히려 공부 흥미를 떨어트리는 역효과만 낳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면 나중엔 진이 빠져서 진짜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공부를 놓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답은 없다.
아이가 잘 따라만 준다면야, 본인이 공부가 너무 재밌어 스스로 이것저것 더 하고 싶다고 하고 밤늦도록 학업에 열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겠지.
어쨌든 나는 매체로 접하는 이야기가 아닌 진짜 대치동의 이야기를 듣고서 현실이 생각보다 더 심하구나 싶어 몸서리가 쳐졌다.
친구랑 나는 그런 교육열에 편승하고 싶지 않다며~ 어릴 때는 학원을 보내도 예체능 정도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다가 친구가 해 준 미국의 유치원(kindergarten) 이야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친구가 사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완전 시내는 아니고 그 근처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친구의 이야기는 이랬다.
친구가 살고있는 동네는 빅테크 기업에서 근무하는 인도계와 중국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교육열은 한국 사람들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끝판왕이고 그 동네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비싸고 좋은 사립 학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립 학교들은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하나로 묶여져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중간에 들어가려면 TO도 나야 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새로 만들어야 하므로 많은 엄마들이 자녀를 유치원부터 보내려고 하고, 때문에 유치원에 입학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립학교들은 학교마다 어떤 추구하는 지향점이 있기 마련인데, 지원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아카데믹한 곳들은 한국계와 중국계, 인도계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체능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곳들은 미국계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 친구는 자신의 딸이 음악에 관심이 많고 소질이 있어보여 여러 악기들을 접할 수 있고 음악활동을 많이 하는 쪽의 사립 유치원을 알아 보았는데, 원비가 무려 연 4000만 원이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가르치고 어떤 활동을 하길래 어느 사람 연봉 정도의 원비를 지불해야 하는 것인지. 하긴 그 동네는 연봉이 1억을 넘어도 최빈층이라고 하니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겠다.
암튼 이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자녀와 부모를 소개하는 에세이도 공들여 써야하고 자녀가 면접도 보아야 하며 여러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아니 만 4살 아이가 무슨 면접?
30분 동안 아이가 집중해서 묻는 말에 잘 대답하고 주위 산만하지 않고 잘 앉아서 대화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지를 보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럼 테스트는 뭐고?
뭐 몇 가지가 있었는데 친구가 제일 생각나는 테스트는 가위오리기라고 했다. 악기를 다루는 등 여러 활동을 하려면 소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어야 하는데 가위로 여러 무늬의 도안들을 잘 오리는가를 통해 소근육의 발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휴..엄청나구만.
그런데도 이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고자 하는 엄마들이 매우 많다고 했다. 그래서 입학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과외도 생겨났다고.
뭐? 아니 친구야! 대치동의 교육열에 놀랐다면서 미국도 장난아닌거 같은데??!ㅋㅋ
친구도 위 음악 중심의 사립유치원에 딸을 보낼지 말지를 고민 중이었다.
저 테스트를 통과하고 저 원비를 내고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과연 그 만한 가치가 있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고.
나도 꿀댕이가 나중에 커서 잘 다루는 악기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저런 유치원은 나로서는 엄두도 못낼 것 같은데...뭐 얼마나 엄청난 교육을 하는지 궁금하기는 하더라.
이런 얘기를 한참동안 하고 있으니 약간의 현기증이 났다.
더불어 조금의 걱정도.
난 지금 너무 아무 생각없이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주의로 꿀댕이를 키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야. 이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