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SF 재난 블록버스터 [더 문]
"너 F야?"
확신의 T형인 내가 하는 언행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밈이 돼 버려 내가 요즘 자주 받는 질문 "너 T야?"
그 질문을 반대로 응용하여 이 영화에 똑같이 돌려준다. 이 영화의 한 줄 정의를 'F가 만든 T 소재의 영화'라고 해두자. 문과 이과와 MBTI 타령도 너무 해묵은 것이지만......
마니악 한 소재가 천만 관객을 목표로 제작될 때
장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목표로 제작될 때는 특유의 K-재난물이 나오는데, 이것도 부산행 이후에는 하나의 장르가 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선호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덕후는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덕후가 가진 그 모든 기질이 한국 조직사회와 사교 사회 내에서의 미덕과 상반되고 충돌한다. 요즘은 덕후나 너드의 주제 자체는 각광받는 사회가 되었다. 콘텐츠가 중요한 세상이니까. 덕후야말로 콘텐츠의 화수분이니까. 그런데, 그래서 이제는 양지에 있는 인싸들이 덕후가 파고드는 소재를 탐닉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천만 관객 드는 영화 잘 만드는 사람이 건드려본 우주나 좀비 소재는 그만 보고 싶다. 나는 우주덕후인 사람이 만든 우주영화, 만화책과 스티븐 킹 소설과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장르소설을 열광하며 읽고 자란 70년 대생이 만든 한국 영화를 한 번만 보고 싶다. 진심.
앞서 말한 F가 만든 T영화도 그렇다. 문이과와 이감성을 넘나드는 양성성을 가진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다. 마케팅하는 개발자가 취업시장에서 가장 환영받는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걸 다 아우르는 감성으로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는 나올 줄을 모른다.
<더 문>은 개봉하기 전부터 의구심을 많이 사고 있던 영화다. 나는 신과 함께 시리즈도 보지 못했으나, 장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목표로 제작되었을 때의 결과물은 예측할만했기 때문에 기대감은 없었다. 다만 나는 SF나 괴수물은 못 만들어도 재미있게 보기 때문에 보러 갔다. 그리고 기대를 너무 안 해서 그런지 뭐 지루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재미도 있었다. 이상한 장면은 많았지만 뭐 그런 것도 재미로 보면 된다. 최소한 보다가 졸았던 승리호보다는 나았다.
장점
도경수가 달에 착륙해서 한국인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 장면이 좋았고, 이 장면에 대해 발을 클로즈업하거나 크게 설명하는 부분이 없어서 좋았다(아래 사진은 발이 클로즈업 되어 있지만, 영화 내에서는 다른 각도로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내적으로, "달에서 본 지구, 달처럼 보이는 지구, 혹은 특히 달의 뒷면과 앞면을 다룬 영화니까 earthrise 장면이 나온다면 모든 단점을 잊을 참이다"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경수가 기진맥진 귀환을 준비하며 드러누워 바라본 우주선의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부풀어가는 위상의 지구 장면을 보고,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단점을 잊은 참이다.
단점
일단 단점을 다 잊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연인을 방에 가두고 따져대는 피곤한 사람처럼.
1. 대사 전달력
이 영화는 대사 전달력이 너무 떨어지고 그래서 상황 설명이 잘 안되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개연성이나 상황 전개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2. 또 K-신파
장르물인 거 자체가 장벽이기도 해서 ROI 나오기는 어려울까 봐 남녀노소 고루 공략하기 위해 택한 작법이 가족 신파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설정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런 설정은 천만을 이끄는 요소가 되기보다는 큰 감동이나 눈물도 주지 못하면서 공연히 영화가 질척거리는 느낌만 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정확히는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작법의 문제이다. 감독님께서 자신의 영화에 K-요소가 많다는 지적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자주 오해되는 부분인데, 대중이 어떤 영화에 신파가 들어가서 싫다고 하는 부분은, 그 영화에 울음의 요소가 나오거나 인정에 얽힌 부분, 슬픈 장면이 나와서 그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다. 신파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라 영화의 톤과 어울리지 않는 갑작스러운 주인공의 우울과 울음, 혹은 전체적 주제에 대해 큰 고민 없이 괜히 가족 간의 설정을 쓱 집어넣은 게 뻔한 얕은 울음 포인트가 오히려 몰입을 깬다는 거다. 그건 위로가 아니라 갑자기 되게 영화가 칙칙해지고 우울해지고 질척거리는 포인트가 된다. 더구나 이런 SF 장르물에서 굳이? <그래비티>에도 신파 요소는 있었다. 산드라 블록도 딸을 잃고 이역만리 우주까지 온 사람인데.
일단 나는 무엇을 봐도 우는 사람인데, 엘리멘탈 보고도 오열하고 인간극장 보고도 오열하고 동물농장 보고도 오열하는 사람인데 진심으로 한국형 신파에는 눈물을 짜보려고 해도 메마른다. 감정선을 빌드 업하는 과정의 문제 같다.
3. 클리셰 범벅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이제는 클리셰 범벅처럼 느껴져
그리고 지금껏 실컷 봐온 <그래비티>, <마션>, <애드 아스트라> 같은 블록버스터 우주영화의 짜집기처럼 보이는 클리셰 장면들로 가득하다. 뭐 클리셰가 달리 클리셰겠냐, 다 흥행되는 요소니까 넣은 거긴 할 것이다. 특별출연한 김래원 배우의 연기와 사건의 발단은 정말 처음 보는데도 5번째는 보는 느낌이다.
4. 진짜 달과 우주기술에 대해 고민하고 만든 거 맞냐
주제의식이 굳이 없어도 되는데 부정에 대한 얘기 주야장천 하다가 끝부분에 "달은 누구 하나가 독점할 수 없는 모든 인류의 것이다" 운운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앞의 스토리들에서 크게 그런 주제의식이 느껴지는 부분이 없어서 뜬금포 사족처럼 보였다. 나사가 정보 독점하고 기싸움하는 내용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고가 악화되도록 이끌기 위한 부차적인 장치였지, 글쎄 저런 대사가 나오게 될 과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5. 배우
설경구 배우는 이전에 그가 맡아온 배역들 때문이겠지만 스마트해 보이는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이런 공부 많이 한 전문가 역할에는 좀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 의견이다. 발성이나 단어를 뱉는 톤 같은 게 모두 공부한 사람처럼 안 보인다는 단점. 김희애 배우는 이 영화를 하드캐리 하는 듯한 연기력을 보여주지만 스토리상 그 인물 주변(NASA......)의 개연성이 가장 떨어지기 때문에 매번 좀 몰입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영어 연기도 열심히 준비하신 것 같다. 사실 나사 설정을 조금만 줄였어도 훨씬 완성도가 좋았을 것이다.
2013년 OCN에서 방영된 팬데믹 드라마 <세계의 끝>을 좋아하는데, 배우들이 다큐톤의 생활연기를 해서 몰입이 더 잘 된다. 흔히 한국 영화에서 몰입이 깨지는 포인트와 신파가 과하다고 하는 지점에는 배우들의 지나친 연극적 대사도 원인으로 들어간다. 특히나 이런 장르 영화 중에서도 현실에 아직 없는 것을 다루는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는 영화라면, 가상의 설정 외의 모든 것은 더욱 극적인 톤보다 현실적 톤으로 만들어야 웰메이드 느낌이 난다. 다큐 톤으로 영화를 만들면 지루해지고 흥행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 영화는 극적인 가운데 극적이고 긴박한 대사 내용은 잘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배우들은 긴박하고 수세에 몰린 톤으로 연기하는데 그걸 지켜보는 대중의 마음은 다급하지 않은 순간들이 많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영화가 루즈해진다.
대형 한국 영화는 모두 같은 톤으로 수렴한다
여름 4대 텐트폴 영화인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 모두 이제 개봉을 완료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만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 마음속 순위는 밀수>>>비공식작전>더문의 순이다. 실제로도 밀수만 크게 웃고 나머지는 크게 웃지 못했다고 한다. 앞의 세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마음속에 떠오른 키워드는 K-신파였다.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된 케이 신파도 좋지만 보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은 나 같은 관객도 있다. 어째 세 가지의 영화를 봤는데 세 영화의 분위기가 모두 비슷한 느낌이어서 말이다. 한국에서 어떤 지방 도시를 방문해도 비슷하게 지자체가 만든 커다란 조형물과 그 지역 특산물 캐릭터가 있고, 대형 식당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다 같은 느낌이다. 이탈리아나 일본의 지방 도시처럼 그 지역만의 색깔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한국 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