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괴수영화가 아니야
1월 9일 넷플릭스에 <고질라: 행성 포식자>가 공개되었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괴수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고지라는 너무 어릴 때 나온 영화여서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를 먼저 접했다. 고질라라는 괴수에 반해서 고지라에 대해서는 좀 찾아보았고, 그래서 기도라라든가 고지라의 숙적들에 대해서는 알고만 있는 수준이다. 한 마디로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나 옛날 고지라 마니아가 아닌 그냥 괴물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개인적인 느낌만 좀 적어보려고 한다.
이 영화는 3>2>1 순으로 그나마 1이 낫다. 솔직히 1편 볼 때도, 하고 싶고 추구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그 메시지 전달에 성공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뒤로 갈수록 작가의 세계관이 점점 강하게 드러나는데, 일기장에나 쓸 법한 이야기를 주인공들의 입으로 쉼 없이 뇌까리니까 좀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만 남는다. 그것도 괴수영화에서!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는 고지라를 너무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묘사해놓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영화가 국내 개봉했을 당시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저 환상적으로 재미있었다. 영화는 "Size does matter"라는 전설의 홍보 카피를 세상에 남겼다. 색드립이지만 불쾌하지 않고 영화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와도 착 맞아떨어지는 문구였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를 보고 재미있어서 고질라에 대해 많이 검색해본 결과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가 재미는 있지만 원작 고지라 특유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 것은 맞다. 그냥 다른 종류의 괴수영화라고 봐야 한다. 최근 고지라의 매력을 잘 살려 제작한 영화는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질라였다. 물론 이 영화도 일본인 특유의 세계적이지 못한 비세련됨을 좀 보여줬지만, 일본의 관료제라든가 재난에 대한 공포심이라든가 현대 일본 사회도 잘 반영하면서 고지라의 원래 매력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것인지, 그래서 누가 봐도 어색한 CG나 상황 설정하여 만든 실사영화를 보게 되면 나머지 부분은 상상력으로 보충해 넣는 것인지, 어쨌든 나도 신 고질라는 부족한 CG를 상상력으로 보충하면서 봤다. 나는 괴수영화에서 괴물 CG의 정교함보다는 괴물의 섭생 묘사나 괴물이 나타날 때의 훌륭한 긴장감 연출 같은 걸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안노 히데야키 영화라서 그런지 자꾸 고질라가 에반게리온의 사도 중 하나로 보이기도 해서 그냥 재미있었다. 에반게리온 st 세기말 느낌도 나고!
한참 다른 곳으로 샜다가 돌아와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그래, 갓질라는 원래 너네 거잖아. 이젠 잘 좀 만들어 봐. 입 좀 다물고 생각 좀 그만하고 그냥 싸우라고! 괴물 나오는 장면까지 빨리 감기하게 만들지 말고. 괴물 보여달라고! 사람 말고 괴물! 일본 사람들은 실제로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데 이렇게 미디어 콘텐츠로 접할 땐 왜 다들 애 같고 나약한지! 인간 특유의 자부심과 친절이 뭐든 네가 왜 여기 있든 생각 좀 그만하라고! 괴물 보여달라고! 사람 말고 괴물! 발전한 시대이니 번역기가 있겠지만 외계인들은 왜 다 일본어로 말하냐!
가뭄에 콩 나듯 하다가 드디어 나타난 괴물. 이 시리즈에서는 괴물을 앞에 두고 즉시 도망가거나 즉시 싸우는 대신, 축구 경기 중계처럼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감독의 의도를 한참 동안 묘사한다. 주인공이 환복하거나 로봇이 변신하는 동안 매너 있게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각종 일본 만화 속 악역들이 생각난다. 화면의 그림을 보고 영화 전개 내용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게 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인물들이 말로 상황을 꼼꼼히 묘사한다.
이번 편도, 제목이 행성 포식자이고 고질라 숙적 끝판왕 격이라는 기도라가 등장하므로 둘이 신나게 치고 물고 뜯고 싸우는 거 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적인 싸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사실은 알았다). 조용하고 정적인 싸움을 박진감 넘치는 목소리로 꼼꼼히 중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고지라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강력한 자기장이 형상되었습니다! 시공간이 구부러졌습니다! 돼지같이 무거운 몸이 공중 부양을 시작합니다! 실체가 침식됩니다!"
또한 이 시리즈는 너무 많은 것을 한 영화 속에서 시도한 나머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끔찍한 혼종...... 이렇게 별거 아닌 거 보여주려고 3부에 걸쳐 그렇게 비장미를 떨고 아서 클라크("극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처럼 보인다")까지 인용하였는가? 우주와 인류의 근원에 관한 진리를 고찰하고 싶었는가? 너희가 SF도 하고 싶고 괴수물도 하고 싶고 인간 근원과 문명의 흥망성쇠 철학도 하고 신화랑 호러도 하고 이카루스도 차용하고 다 하고 싶은데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금단의 문만 열었을 때 끔찍한 혼종 카이쥬가 탄생하지.
메가 고질라까지 등장하였는데 스케일로 퍼붓는 매력도, 이렇다 할 싸움 장면도, 갑자기 나타난 먹이사슬 최상급자의 그럴듯한 생물학적 특징 설정도, 할리우드 괴수물과 구분되는 이 섬나라 출신 괴물 특유의 유니크한 우울함도, 외부 위협요소로 벌어지는 인간 군상 갈등 묘사도 없다. 다 시도만 하고 실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힘겹게 3편까지 극을 끌고 와서 결국은 사람에게 뒤통수 맞고 사람과 사상이랑만 싸운다.
기도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긴장감이나 우울한 아포칼립스 세계관 설정은 좋았다. 코너에 몰린 집단이 이단에 기대고 선동하고 선동 당하는 본성 묘사, 인류는 결국 진화하지 못한 불완전한 생명체로 지구에서 도태될 것임을 이야기하며 인류 근원과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이단 묘사, 인간은 어디에서나 적응해나간다는 메시지를 결말에 주면서 동시에 변하지 않는 본성 때문에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라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추락해버린 이카루스 신화 이미지를 빌려 암시하기도 하는 묘사는 시도만 좋았다.
이 영화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충분히 알기 때문에 안타깝다. 성공했다면 새로운 시도라고 호평받았을 것 같다. 작가가 과학적 지식이나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너무 그것을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이지 못하고 욕심내어 욱여넣고 있다.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맥락에 맞지 않게 풀어만 놓는 지식은 허세로 남기 쉽다. 발전한 작화만큼(막상 괴물 디자인은 매력 없고 밋밋하다. 80년대 로봇으로 괴물 만들어서 영화 찍을 때보다 괴물이 안 움직인다.) 세련되게 만들었으면 명작이 될 수도 있었을 시리즈인데.
이 시리즈를 세 개 다 열심히 챙겨 본 나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 이제 고질라와 콩의 싸움만이 나의 마지막 남은 기대를 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