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했던, 꼭 그만큼 아쉽던 종착역. 혹은 출발역.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그리고
제법 마니아가 있는 듯한 이 시리즈의 종착역, 글래스가 지난주에 드디어 개봉하였다.
글래스(2019)
감독 / M. 나이트 샤말란
출연 / 브루스 윌리스, 제임스 매커보이, 사무엘 M. 잭슨, 안야 테일러 조이, 사라 폴슨, 스펜서 크리트 클락, M. 나이트 샤말란(카메오 출연)
드디어 기대하던 두 대머리의 격돌이 성료 되었다. 이번 영화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측된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속편이 나올 줄도 몰랐던 언브레이커블과 한참 뒤에야 나온 23아이덴티티,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절묘하게 꿰매어 새로 창조한 히어로 세계관이 신선하고 감탄스러우나, 아이디어와 기획이 감탄스러운 것에 비해 디테일의 개연성은 아쉬운 점이 많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기예르모 델 토로, 아니쉬 차간티(서치) 등 이민자 출신 감독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활약하고 있는데, 이들이 범람하는 히어로물을 비롯해 지겹고 빤한, 지나치게 미국스러운 할리우드 영화들에 신선한 충격과 영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알록달록한 코스튬과 지구를 다 깨부수는 비현실적 설정들로 충만한 다른 히어로물에 비해(그렇다고 이 히어로물들이 싫다는 건 아니다), 굉장히 현실 밀착적 설정이기 때문에 신선하고, 인물의 고뇌와 탄생 배경 속에 인간 심리와 선악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담겨서 좋다.
나이트 샤말란으로 말하자면 <식스 센스> 이후에는 이렇다 할 찬사를 받지 못하며 크고 작은 혹평과 늘 함께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좋아하는 감독이다.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애프터 어스>도 재미있게 봤을 정도로 팬이지만, 이번 영화는 각본의 일부 디테일은 할리우드 공장의 전문가들에게 조금씩 위탁하여 완성하였으면 훨씬 멋진 영화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맘이 유난히 든다.
영화는 호흡이 길지만 이야깃거리가 많고 재미있다. 나이트 샤말란 특유의 초현실적 이야기를 여전히 매우 좋고 특기인 호러와 서스펜스 연출이 쏴라있다. 후반부에서 좀 김이 새지만 전체적으로 긴 호흡에도 긴장감이 계속 살아있다. 몇 장면에서는 조악하고 촌스러운 느낌이 좀 든다. 이것이 훗날 나름의 멋과 스웩이 되어 재평가될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대사는 이 영화의 핵심 대사인 "한정판이 아니라 비기닝" 보다 이것.
"모든 비범한 현상은 설명 가능하죠. 설명 가능하다고 해서 비범하지 않은 건 아니죠. 비범한 건 비범한 겁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전편 23아이덴티티로부터 몇 주 후이다. 강력한 신체 능력에 비해서는 쪼잔하게, 도시의 잔챙이 범죄자를 소소하게 응징하고 있던 언브레이커블 데이빗 던. 아들(그대로 같은 배우가 아들로 출연한다)과 함께 겉으로는 가게를 운영하고 뒤로는 페어를 이루어 범죄자 응징을 한다. 이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방문하기도 한다. 19년 전에는 마약 밀매상으로 언브레이커블에 등장하였는데 그조차도 연결된다. 그때 마약 판 놈이 개과천선하여 23아이덴티티에서는 CCTV 기사로 등장하여 후터스 예찬을 늘어놓았던 것 같고, 이번 편에는 부자가 운영하는 방범 물품 파는 곳에 업무와 연관하여 방문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번 영화에서 유난히 동공지진 연기를 펼치는 등 열연한다.
여기서 잠깐 23아이덴티티에 드러난 캐빈 외 패거리-제임스 맥어보이 캐릭터의 설정을 설명하면,
*극중의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 23가지, 서로 다른 이름/성별/성격을 지닌 각각의 자아가 내면에서 의자에 앉아있다가, '불빛'을 차지한다. 불빛을 차지한 인격이 발현되는 인격이다.
*2014년 이후 케빈의 자아는 나온 적이 없다. 케빈은 3세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어머니의 가혹한 학대를 받았으며, 3세 때 받은 학대가 결정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에도 위축되고 상처받은 채로 살아왔으며, 결국엔 자아분열증을 앓게 된다.
*2014년 이후부터는 데니스와 페트리샤, 헤드윅이 주로 불빛(주도권)을 차지하고 케빈의 육체를 사용한다. 헤드윅은 원래 자아들 사이에서 놀림받는 존재였으며(케빈의 어린 시절, 위축되어 놀림받는 쩌리 시절 트라우마의 반영같은 자아일 것) 페트리샤는 헤드윅이 다른 자아들을 억누르고 페트리샤와 데니스가 불빛(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이용한다. 패거리는 억눌려 있다가, 동물원에서 케빈이 17-18세 여고생들에게 성희롱을 당하자 위축돼 있던 예전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다시 불빛 아래로 나오게 된다.
*데니스와 페트리샤는 23가지의 자아 외에 24번 째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 늘 사회에서 상처받고 놀림받는 케빈의 육체와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뇌의 방어기제인 셈인데, 그것은 인간의 신체 능력치 자체를 초월한 '비스트'라는 존재이다. 이 비스트는 데니스가 구두로 묘사하는 '키가 더 커지고, 근육질이 되며, 머리카락이 길다. 손 길이는 케빈 신체의 두 배가 된다. 벽을 기어다니고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다닐 수 있다' 라는 묘사와 일부 같고 일부는 다르다. 어쨌든 플리쳐 박사의 논문 속 다른 환자 사례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뇌 속의 방어기제가 만든 플라시보 효과에 의해 신체능력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스트의 설정이 어떻게 언브레이커블과 연결되느냐 하면, 비스트가 케이시를 놓아준 것은 케이시가 학대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언브레이커블의 데이빗(브루스 윌리스)은 상처를 입어도 치유되고 마는 불사조 강철인간이다. 그러므로 상처 하나 없는 데이빗은 비스트의 숙적이 될 숙명이다. 23아이덴티티의 반전 아닌 반전이 이 데이빗이 나타나며 앞으로의 전개에 흥미를 확 불어넣어 준 부분이다.
케빈의 인격 패거리는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영화 시작 시점에서 네 명의 소녀가 납치 감금되어 있는데, 데이빗 던은 이 소녀들을 구해주려다 패거리와 마주친다. 고대하던 두 대머리의 만남이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이루어지는 편.
소녀 떼들을 구하고 둘이 숙명적으로 맞붙었지만, 정체불명의 정신과 의사와 경찰들에 의해 둘 다 체포된다. 이렇게 초인적 힘들 가진 둘을 어떻게 체포할까 의아하지만, 물에 약한 데이빗 던은 마침 이 날 비가 내리고 있어 약해져 있었던 것 같고, 패거리는 정신과 의사가 가져온 의문의 조명 장치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스포 있어요]
정신과 의사는 자신이 슈퍼 히어로라고 믿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것이 착각이라고 하며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의사는 히어로(?)들의 각 약점을 이용하여 이들을 탈출할 수 없는 방에 가둔다. 이 병원에는 패거리와 데이빗 외에, 엘리야(미스터 글래스)도 이미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엘리야는 마취제를 듬뿍 맞고 약에 취한 채 무기력한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이 의사가 극중 중요한 역할인데, 좀 더 아름답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맡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초반부에는 선인인지 악인인지 좀 더 헛갈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병원이 작은 병원도 아닌데 왜 데이빗과 패거리를 같은 층 그것도 마주 보는 방에 가두는 거야. 두 사람이 서로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각자 감금되었을 때, 동시에 열렸다가 닫히는 문을 통해 맞은편의 상대방을 발견하고 째려보는 장면이 좋기는 했다.
박사는 요주의 세 인물을 모아두고 정신교육을 시작한다. 너희가 보여준 슈퍼파워는 사실 초인적 힘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인데,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사실 너희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이지 초인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패거리와 데이빗은 그 말을 거의 믿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새뮤얼 잭슨이었던 것입니다. 이 엘리야, 미스터 글래스의 빅 픽처 하에 그의 의도대로 모든 전개가 굴러가고 있다. 무기력하게 휠체어에 앉아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고 있던 미스터 글래스 엘리야는 사실 진정제를 받아먹지 않고 있었다. 밤마다 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던 엘리야는 케빈 패거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의 초인적 두뇌와 24번째 인격의 초인적 힘을 합하면 굉장한 슈퍼파워가 될 것임을 인지한다. 미스터 글래스가 깨진 유리조각으로 보안요원의 목을 그으며, 숨겨 왔던 힘을 드러내는 장면부터 급 흥미로워지기 시작.
데이빗이 자신의 힘을 의심하다가 결국 불신을 깨고 방 탈출에 성공하는 장면도 좋았다.
글래스맨의 계획대로 결국 정신병원 앞에서 쌈이 붙는다. 그리고...... 파국이다!!
[강력 스포]
미스터 글래스가 계획한 열차 사고. 그 사고에 케빈의 아버지가 연루되어 있다는 반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다. 긴 시간을 두고 전개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이렇게 개연성 있게 하나로 모으는 설정이 정말 좋았음. 23아이덴티티 결말에 언브레이커블이 연결되며 앞으로의 전개에 흥미와 개연성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 열차 안에 케빈의 아빠가 타고 있었다는 점이 서로 다른 세 영화를 어색하지 않게 묶어준다.
히어로 대 히어로는 언제나 기대감을 모은다. 열차 사고에 캐빈 아빠가 연루되어 있고 사고가 미스터 글래스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이 기대를 건 두 대머리의 싸움이 잠시 중단되는 연유로는 탁월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오 너네 엄마 이름도 마사야? 우리 엄마돈데! 그리운 내 어머니! 하며 중단되는 싸움에는 갖다 붙여 비교해서도 안 된다. (잭 스나이더도 좋아하는 감독 아저씨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주요인물들을 싹 다 죽여버리려고 이렇게 힘들게 전편들과 이번 영화를 끌고 온 건가! 싶은 허무함이 크게 밀려온다.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에 결말의 허무한 인상도 상당히 작용할 것이다. 히어로물인데 히어로들이 죄다 최후를 맞는다.
케빈은 케이시에 대한 인간적 애정으로 드디어 정신 차리고 불빛을 차지하지만 그 순간 못생긴 엘리 박사의 안티 히어로 조직에 의해 총을 맞고 사망한다. 케이시 너 대체 그 타이밍에 케빈 왜 소환한 거야......
데이빗이야말로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다. 재수없으면 접시물에도 코 박고 죽는다는데 조직원들에 의해 도랑의 고인 물에 고개를 처박힌 채로 죽는다. 주인공에 대한 예우로서는 너무한 게 아닐까 싶은 개죽음. 우리 맥클레인한테 진짜 이럴 거야?
미스터 글래스는 나름 업적을 달성하고 자신의 큰 그림을 성공시킨 채 죽는다. 결국 미스터 글래스가 큰 역할을 해서 제목이 글래스였던 것이군. 많은 관객이 데이빗의 미약한 존재감으로 인해 이번 영화에서는 미스터 글래스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쉼 없이 이 MG가 코믹스 세계에 대해 대놓고 설명충처럼 떠들어 대는 것이, 키치함을 의도한 것 같으나 영화와 어우러지지 않고 전작의 분위기와 위화감을 가지며 붕 뜬다(고 개인적으로 느낌).
어쨌든 미스터 글래스 계획대로, 자신의 슈퍼파워에 긴가민가하며 자아를 감추고 있던 히어로들은 그가 세상에 보여주고 들여준 방송을 계기로 세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다음엔 어떤 설정의 캐릭터가 나올까?
히어로의 존재를 감추며 제거하는 조직이 있고, 의사가 그 조직원이었다는 반전(?)은 좋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게 MG(미스터 글래스)의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의사가 깨닫는 장면이 좀 조악했다. "내가 미스터 글래스에게 카메라를 달아 줬어!우에에에에에에엥" 샤말란의 반전 강박 부작용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MG가 일부러 CCTV에 찍히기 위해 긴 복도를 걸어갔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며 비명 질러주지 않고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방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나이트 샤말란의 인간미가 좋다. 다소 산만하게 늘어놓는 디테일도 인간적이지만(......!!??) 영화 속에 녹아있는 인간미가 좋다.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해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다중의 다른 인격을 만들어낸 히어로, 악인이지만 유리처럼 약한 몸으로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고통을 겪은 후 다른 사람들도 이제 자아를 드러내며 살도록 한 히어로, 고통받은 사람들은 순결하다는 발상 같은 것이 좋다.
케이시 역의 안야 테일러 조이는 인물 구경 할 일 없는 이 영화에서 중국집 단무지같은 역할을 한다. 예쁘다. 이 영화에서 엘리 박사 만나러 왔을 때, 전편에서 구조될 때 동물원 직원이 걸쳐줬던 동물원 점퍼를 한 번 더 걸치고 나온다.
매커보이의 연기는 이제 그냥 너무하다 싶어 감흥이 없을 정도다. 전편에서 이미 놀랐는데 이번에도 너무 다이내믹해서. 그런데 2000년대에 꽤 많은 마니아 팬을 양상 했던 리즈 시절의 외모는. 이제 안녕인 듯하다.
이번 편은 전편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잔인하지 않다. 피가 나오는 장면도 거의 없고, 비스트가 다른 사람의 살을 뜯을 때도 피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공포감을 준다. 등급 심사를 의식한 것인지.
글래스맨이 죽어가면서 실천한 자아실현 운동은 혹시 속편이 나온다면 새 히어로들로 함께 새로 시작될 것이다. 주인공들은 죄다 죽어버렸고, 새로운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출연하며 시리즈가 계속 나온다면 이 세 편이 요즘 유행하는 비긴스나 오리진이 될 것이다. 이야기꾼인 나이트 샤말란이 또 어떤 초인과 어떤 초현실을 창조하여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나는 언제나 만화가들이 영화인들보다 좀 더 천재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온전히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디테일한 그림까지 다 1인이 그려내기 때문이다. 나이트 샤말란은 이렇게 코믹스 작가들이 혼자 몇 년에 걸쳐서 하는 창조를 드물게 영화에서도 해냈다. 편애가 좀 담긴 의견이지만 앞으로도 감 떨어지지 않고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길. 기대한다. 감독님 다음 각본부터는 메이저 문화권 공장의 전문가와 함께 씁시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고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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