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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아이덴티티(Split)

세상 속에서 고통받은 가슴을 위하여

by 랄라


For those who suffer.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여.


악을 경험하고 상처입은 후에도 비뚤어지지 않은 단단한 가슴이

아직 때묻지 않은 선보다 언제나 고결하다.


케이시가 흘린 마지막 눈물은 치유와 변화.
초반부터 팽팽하게 쉼 없이 휘몰아치는 긴장감과 공포 끝에, 결말에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초반 자동차 납치의 팽팽한 긴장감부터 예사롭지 않다. 소녀들이 영문도 모르고 지하 방에 갇혀 있는 내내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다가, 24번째 인격이 마침내 처음 등장할 때는 공포가 극에 달했다가, 샤말란만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그보다 신선할 수 없었다. 초중반 모든 설정과 장치들의 개연성을 설명하며 던지는 일관된 메시지.

샤말란만 할 수 있는, 샤말란스러운, 샤말란다운 영화.


다크 나이트에는 악을 겪은 후 비뚤어진 조커, 악을 겪고도 선을 지키는 배트맨 외에 복병의 악역 출연자가 있는데 바로 투페이스, 하비덴트. 하비덴트는 그동안 세상의 악을 겪어보지 않아서 선했을 뿐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악을 겪고 나서 그 자신도 악이 된다.
케이시의 친구들이 케이시에게 그랬듯, 얼마나 많은 해맑은 선의가 고통을 아는 타인에게 독화살이 돼 꽂힐 수 있는 지, 굳이 악을 겪지 않고도 종종 목격한다. 케이시의 학교 친구들은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아직 어린 청소년들, 데니스가 "불결한 순수함"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다. 아웃사이더같은 친구를 혼자 남겨두고 초대하기에 미안해서 불렀다며 해맑은 선의를 베푸는 친구들에 비해 케이시는 일찍 고통을 겪은 존재. "너희들은 모든 것이 쉽지? 하나 다음에 둘이 올 수 있다는 생각만 하지? 저 문 밖엔 잠긴 문이 하나 더 있어."
인사이드 아웃의 조이는 분명 아름다운 존재지만, 그 해맑음과 해맑음의 강요는 무의식중에 의도치않게 종종 타인을 상처입힌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간주되고 평가절하되던 슬픔이만의 치유력, 눈물은 많은 사람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 울렸다.


가족의 폭력, 가족의 폭력으로 다친 가슴에 다른 종류의 폭력을 가하는 사회. 자신들과 같지 않고 자신들과 어울려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고 암묵적으로 던지는 폭력.





(스포 있어요)


'그들을 피해 일부러 사고를 쳐 그들로부터 떨어진다'는 케이시가 '크리쳐' 앞에 지난 상처의 증거를 드러내고 서서 '상처입은 진화한 존재, 고결한 존재'로 재명명되는 장면, 그 순간 케이시의 눈에 넘쳐 흐르는 눈물은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고통으로 가득하던 삶 속에서, 케이시가 자신 안의 해답을 찾은 것 같은 장면. 악을 겪고 고통으로 찢긴 가슴을 견디지 못해 악이 된 존재와 달리, 악을 겪었지만 덤덤하게 세상과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얻은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케이시는 일부러 그들로부터 떨어져 벌받는 방에 가야했지만, 고통이 고결한 세상에서는 반대로 다른 소녀들이 벌 받는 방에 갇히고, 케이시만이 남겨진다.
비록 악이 명명한 "순수함"이지만,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상처받은 맷데이먼을 끌어안고 몇 번이고 되뇌었던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의 공포영화 버전 같은 느낌마저 준다.
굉장하다. 나이트 샤말란. 언제나 신선하고 창의적임.ㅜ 초반부터 절정까지 팽팽한 긴장감, 공포 끝에 힘을 탁 풀리게 만드는 결말.
플래처 박사가 문틈에 넣어둔 손수건이나 마지막 메모 같은 장치들도 샤말란답다. 상담 중에 '당신의 직장'이라고만 묘사되던 곳이 동물원이었다는 것, 소녀들이 감금된 곳이 그 동물원 지하였다는 것, 동물을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자란 주인공 소녀, 어린 시절 학대를 견디지 못해 정신질환을 얻은 데니스가 종국에는 가장 물리적 힘이 강한 동물,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보는 존재들의 행동 패턴을 보고 그들의 힘조처 넘어선 존재로 자신을 상정하는 것, 그 모든 설정이 결말에 이르러 하나의 일관된 개연성으로 연결된다. 같은 고통을 받으며 사란 주인공과 악은 조커와 배트맨처럼 다른 존재가 된다. 하지만 조커가 "너도 나 같은 별종이야."라고 말했듯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공통분모는 주인공이 악을 파악하고 그를 피해갈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유아시절부터 아빠와 삼촌을 따라 사냥터를 다닌 케이시, 아빠는 케이시에게 맹수의 공격적 본성과 직면하는 방법을 가르쳤고(아빠가 참 딸을 잘 키우셨네), 삼촌은 세상의 고통과 야수성을 가르쳤다. 곱게 자란 친구들이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고통 속에서 당장의 상황만 모면하기 위해 상황 파악도 채 하지 않고 급급한 대처를 할 때, 케이시는 "오줌을 싸(Pee on yourself)"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데니스가 결벽증이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파악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케이시에게는 삼촌에 의한, 익숙한 상황. 실제로 성폭력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저항 메뉴얼로 언급되는 방법이다), 데니스의 23개 인격 중 하나인 9세 헤드윅을 달래가며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친구들의 성마른 대처를 말렸다. 페트리샤와 대화하고 데니스가 화장실을 치우라며 청소도구를 들고 왔을 때, 가장 빠르게 눈치를 채고 도구를 받아든 것도 케이시. 어리지만 눈치가 빨라야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삼촌이 데리러 왔다"는 여경의 말에 눈물 고인 눈으로 결연한 다짐을 하는 듯한 케이시. 개인적으로 그 결연한 얼굴이, 그 뒤 케이시가 경찰에게 삼촌을 신고했다는 암시일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식스센스라는 센세이셔널한 명작 이후 나이트 샤말란이 반전에 집착하며 시시한 작품을 만든다고도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나이트 샤말란의 작품이 시시하거나 와닿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반전에 집착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공포가 사랑으로 마무리 돼 끝나든, 겁에 질린 한 존재가 자신과 당당하게 직면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든, 김빠지고 산으로 가는 결말이 아니라 "자기 안의 해답을 발견하는 과정" 같았다.
감정을 쥐어내거나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핍박받고 피해입으면서도 덤덤하게 제 몫의 삶을 살아내어오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잠재력을 샤말란은 정말 잘 대변해낸다.
'빌리지'에서 세상에 상처받고 자신들만의 마을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 그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난생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주인공이 그랬고, '애프터 어스'에서 내면의 공포를 버리는 순간 크리쳐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그를 이길 수 있게 된 주인공이 그랬다.
정말 샤말란스럽게 샤말란이 흔해빠진 소재 다중인격을 샤말란만의 해석으로 다루는 샤말란의 영화.


[해석: 스포일러 주의]

*극중의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 23가지, 서로 다른 이름/성별/성격을 지닌 각각의 자아가 내면에서 의자에 앉아있다가, '불빛'을 차지한다. 불빛을 차지한 인격이 발현되는 인격이다.
*2014년 이후 케빈의 자아는 나온 적이 없다. 케빈은 3세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어머니의 가혹한 학대를 받았으며, 3세 때 받은 학대가 결정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에도 위축되고 상처받은 채로 살아왔으며, 결국엔 자아분열증을 앓게 된다.
*2014년 이후부터는 데니스와 페트리샤, 헤드윅이 주로 불빛(주도권)을 차지하고 케빈의 육체를 사용한다. 헤드윅은 원래 자아들 사이에서 놀림받는 존재였으며(케빈의 어린 시절, 위축되어 놀림받는 쩌리 시절 트라우마의 반영같은 자아일 것) 페트리샤는 헤드윅이 다른 자아들을 억누르고 페트리샤와 데니스가 불빛(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이용한다. 패거리는 억눌려 있다가, 동물원에서 케빈이 17-18세 여고생들에게 성희롱을 당하자 위축 돼 있던 예전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다시 불빛 아래로 나오게 된다.
*데니스와 페트리샤는 23가지의 자아 외에 24번 째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 늘 사회에서 상처받고 놀림받는 케빈의 육체와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뇌의 방어기제인 셈인데, 그것은 인간의 신체 능력치 자체를 초월한 '비스트'라는 존재이다. 이 비스트는 데니스가 구두로 묘사하는 '키가 더 커지고, 근육질이 되며, 머리카락이 길다. 손 길이는 케빈 신체의 두 배가 된다. 벽을 기어다니고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다닐 수 있다' 라는 묘사와 일부 같고 일부는 다르다. 어쨌든 플리쳐 박사의 논문 속 다른 환자 사례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뇌 속의 방어기제가 만든 플라시보 효과에 의해 신체능력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된 후 플리쳐 박사와 '플리쳐 박사 집에서' 만난 자아는 모두 데니스이다. 배리를 가장한 데니스. 플리쳐 박사는 배리답지 않게 스케치를 챙기지 않는 모습, 강박처럼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에서 그가 배리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마지막 거울을 보고 대화하는 존재는 데니스와 페트리샤, 헤드윅 뿐. 세 자아만이 완전히 케빈을 지배한 상태에서 마무리 된 듯.
*케빈의 풀네임 "케빈 웬델 크럼"을 그의 엄마처럼 강력한 어조로 부르면 순간 3세 때 기억의 강력한 트라우마가 트리거가 되어 케빈을 소환할 수 있지만 그동안의 치료가 도루묵이 되면서 23개의 자아가 뒤엉키고 질서가 사라져버린다. 플리쳐는 치료를 위해 케빈을 부르지 않았지만 동물원 지하에 데니스 패거리가 꾸민 충격적 장면을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서 케빈의 풀네임을 불러 다른 자아를 잠재울 수 있게끔 메모를 남긴다. 케이시는 플리처 박사가 문이 잠기지 않도록 쑤셔넣은 흰 손수건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데니스는 플리쳐 박사 몰래 모의를 꾸미기 위해 계속해서 플리쳐 박사에서 혼자 사느냐, 당신이 몇 살이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되냐고 묻는데, 플리쳐 박사는 만약을 대비해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해놓은 상태라고 답한다. 마지막 경찰들의 대화 중에 그녀의 가족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대사가 나오고, 데니스에게 환자들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핏줄도 없이 혼자이신 듯. ㅜㅜ
*케빈의 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사망(아마도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케빈이 아버지를 위한 꽃을 놓는 것으로 보아. 꽃을 두고 비스트로 변하기 전, "고마워, 데니스"라고 하는 자아가 케빈이라고 생각했는데 케빈이 돌아와서 기억하는 최종 날짜가 2014년인 것으로 보아, 페트리샤인가. 그런데 왜 안경을 썼는지 모르겠음.
*케이시는 못을 이용해 방에서 탈출한 뒤, 23개의 자아가 남긴 동영상 속에서 배리가 배리의 모자를 집어들자 그 안에 열쇠 꾸러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방 탈출에는 성공한다.
*케이시 배 부근에 난 상처는 도망가는 도중에도, 총을 겨누는 와중에도 계속 보인다.
*잠깐 나와서 플래쳐 박사의 cctv를 봐주던 후터스 예찬 직원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 본인이다. 후터스 이야기는 약간의 재미요소+박사의 심리학적 지식 드러내기용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추가: 결말 해석; 영화보고 나서 언브레이커블을 챙겨봤다.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인 던(브루스 윌리스)은 각종 테러와 사고 속에서도 혼자 생존하는 '언브레이커블' 슈퍼파워를 가진 히어로이다. 당연히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상처가 없다는 것은 23아이덴티티의 케빈과 대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나이트샤말란의 차기작이라는 속편은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이자 23아이덴티티의 속편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두 영화는 각각 '영웅의 탄생'과 '악당의 탄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언브레이커블' 속에서 부서지지 않는 영웅의 신체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테러를 통해 많은 희생을 초래한 '미스터 글래스'는 속편에서 또 다른 악의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을 듯.


덧.
결말에는 언브레이커블의 던(브루스윌리스)이 등장한다. 세계관이 연결된다고 하는데,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샤말란 작품 중에 유일하게 안 본 작품이 언브레이커블인데, 챙겨서 찾아봐야 할 듯. :) - 바로 다음날 보고 위에 결말해석 기재!


보이 중의 보이 맥어보이는 아무래도 탈모피플에 합류한 것 같다. 그렇게 맥어보이는 대머리가 되었다. 간바레 맥어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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