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be me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2016)
영적 능력을 갖고 있는 모린은 파리에서 퍼스널 쇼퍼로 일하며 3개월 전 세상을 떠난 쌍둥이 오빠 루이스의 흔적을 찾고 있다. 파리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고용주인 키라는 업계에서 몬스터로 불리고, 사후세계를 헤매고 있을 루이스의 신호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마주친 키라의 남자친구 잉고. 기왕 남의 입맛에 맞는 예술만 할 바에는 돈이나 더 받고 일하라는 잉고의 말, 어느날 갑자기 받은 의문의 문자 텍스트에 필요 이상으로 대답하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기 시작한 모린.
영화는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고 불친절하다. 해석은 영화에 나오는 많은 떡밥들을 가지고 알아서 각자 하면 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딱히 딱 맞아 떨어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경우도 없는 영리한 영화이다. 심겨 있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어떻게 조합해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마치 ‘곡성’을 볼 때처럼 보는 내내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영화의 소재와 대강의 내용조차 모르고 볼수록 재미있다. 인물 간 관계조차도 내용이 전개되면서 순차적으로 소개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두 시간 내내 배우의 일상적인 행동들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클라우드 오브 실스 마리아’에 이어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두 번째 조합인데,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체의 매력을 본인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 가죽점퍼와 진, 스니커, 내추럴한 차림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무심하게 발로 스탠드를 툭 켜고, 무표정한 얼굴로 파리 거리를 활보하고 통화를 하고, 손가락을 떨며 문자 텍스트를 적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도 지겹지가 않다. 배우 자체가 가진 매력을 영화에 정말 잘 이용했다. 어쩌면 취향에 따라 지루했을 수도 있을 이 영화가 안 지겨운 건 4할은 무섭게 잘 만든 감독 덕, 6할은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체이다.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봐도 예쁜 얼굴이 열일한 것도 물론. 왜 다크서클조차 예쁜 걸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는 가능한 해석과, 나의 해석을 몇 자 적어본다.)
“I know you.
And you know me.”
타인의 쇼핑을 대신 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모린은 타인의 경제력과 명성으로 대여ˑ구매한 옷들을 기계적으로 무표정하게 나르며 자신답지 못한 삶을 산다. 형제까지 잃고 삶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마주한 어떤 영적 존재(자신일 수도, 사후세계의 형제일 수도, 제3의 범죄자일 수도 있는)가 문자 텍스트를 보내며 모린의 내면을 꿰뚫어본다. 요즘 유령은 휴대폰도 하는 건가. 아니면 모든 게 모린의 머릿속 생각들을 비유한 건가. 아니면 범죄자인가. 모린은 텍스트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진심을 마주한다. 누군가에 입맛에 맞게 창작품을 만드는 대신 자기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만든 것의 주인이 되고픈 진심. 치수까지 같은 유명인의 의상을 대신 사주면서 모린은 애써 그것들에 무심한 척 거리를 둔다. 그러다가 직원의 권유에 의해 신발을 신어보고, 관능적인 디자인의 벨트를 입어보고, 급기야 키라의 빈집에서 옷을 입어보고 침대에 눕기 시작하면서 점점 봉인해두었던 자신의 진짜 욕망과 마주한다.
영적 존재는 루이스였나, 모린 자신이었나
지박령(죽고 나서 특정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있는 영혼)인 줄 알았던 루이스는 어느 순간부터 살던 집 이외의 장소에서도 늘 모린과 함께 한다(그래서 잠시 영이 점점 세지나, 라고도 생각함).
실제로 마지막에 모린이 그 존재에게 던진 질문(“너는 누구야? 루이스야? 아니면……나야?) 에 존재가 답했듯 모린 자신이라고 볼 수도 있고, 루이스라고 볼 수도 있고, 굳이 쌍둥이라는 장치를 일부러 넣은 만큼 ‘모린이면서 루이스’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쌍둥이라 약간 끈이 이어져 있기도 하고, 그래서 섞여있다고 보는 게 나는 가장 맞을 것 같은데, 라라의 새집에서 한 번 모습을 드러내고 컵을 깨뜨린 남자는 루이스가 맞다고 본다. 물론 형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매우 슬퍼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약간의 근친코드도 느꼈다고 하면 오바인가.
영매인 모린이, 단단하게 연결돼 있는 반쪽 같은 누군가와 사후세계와 이승에 각각 존재하면서 반쪽 짜리 인생을 사는 느낌도 난다.
영적 존재란 건 없고 모두 모린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건가, 도 싶었지만 클림트와 빅토르 위고가 영적 존재를 접했던 대목이 삽입된 것과, 친구들과 경찰 등 주변 사람들까지 그 시각적 행동들에 영향을 받고 반응하며 극이 전개되기 때문에, 영적 존재가 가상의 비유는 아닌 것 같다.
범인은 잉고가 맞는가, 그렇다면 잉고가 문자 메시지를 보낸 존재인가
잉고가 범인인 건 맞지만 잉고가 호텔 329호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기 전 어떤 존재가 한 번 밖으로 나갔고, 잉고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어디선가 아이폰 문자메시지를 작성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잉고가 나간 뒤따라 나가는 존재가 또 있다. 그래서 영적 존재가 분명 개입을 하기는 했다고 생각한다. 범죄 관련 문자를 제외하고는 루이스 혹은 모린 혹은 둘다인 그 영적 존재와의 대화가 섞여있다고 생각하고, 사실 몰래 옷을 입어볼 시점의 그것들은 모린 자신 내면의 대화에 제일 가깝긴 하다고 생각한다. 잉고가 늘상 옆에서 지켜보듯 훤히 그녀의 이동 정보를 꿰고 있던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웬만큼 심장 쥐락펴락 할 줄 아는 영화 아니면 겁이 정말 없는 편인데 꽤 긴장하면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곡성’ 볼 때처럼 여러 떡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조합을 해볼 수 있어서 보는 동안 즐거웠다. 사실 살인은 모린이 했나? 모린도 귀신인가? 사실은 모린도 심장병으로 죽었나? 설마 남친인가? 역시 잉고네? 사실은 귀신이 아니고 자아분열인가? 등등. 그래서 누군가는 불친절하다고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고, 간혹 오잉? 할 수 있는 장면이 있지만 나름 보는 동안 재미있던 영화였다. 긴장감을 내내 가져가고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난 이런 영화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