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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r 18. 2020

서평 -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희곡인지 몰랐고 소설인 줄 알았는데 책을 펼쳐들고 보니 희곡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희곡보다는 영화로 먼저 알았다. 말론 브란도의 우수에 찬 눈빛, 도톰하니 섹시한 입술, 그리고 비비안 리의 불안에 떨고 있던 눈동자 – 1939년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영화였고 내용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19금에 가까워서 그랬는지 유명한 작품인 것이라는 것은 많이 들었으나 실제로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영화를 보려고 이리 저리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영화는 보지 못했고 대신 희곡을 읽게 되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감독엘리아 카잔출연비비안 리, 말론 브란도개봉1957. 04. 19.



작품은 165쪽의 짧은 분량에 희곡과 연극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배경도 스텔라의 집 침실과 거실, 부엌으로 아주 한정되어 있고 등장인물도 블랑시, 스텔라, 스탠리, 스탠리의 친구 3명 그리고 이층집 유니스 총 7명뿐이다. 그나마도 스탠리의 친구와 유니스는 출연 분량이 거의 미미하여 블랑시, 스탠리, 스텔라 3명이 출연 분량의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구조덕택에 책은 정말 아주 쉽게 금방 읽힌다.


배경은 1947년 미국 뉴올리언즈. 2차 대전을 마치고 미국이 한창 성장을 시작하고 가속하려던 시기 동시에 빠른 발전 속에서 불안이 서서히 침투해오고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 한 때 제법 잘살던 집 큰 딸이었던 블랑시가 서른이 훌쩍 넘어 동생 스텔라의 집을 불시에 찾아온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극락이라는 곳’의 스텔라 집에. 자매는 아주 다르다. 어릴 때 집을 떠난 스텔라는 ‘할 수 있는 최선은 혼자 살아나가는 거였다’는 그녀의 말처럼 현실적이며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가급적 생각하고 생활하는 여자이다. 반면, 언니 블랑시는 강하거나 자립적이지 못한 여린 사람으로 ‘사실주의 보다 항상 마법을 원하는’ 현실도피적인 사람이다. 블랑시의 이 기질은 스텔라의 남편인 스탠리와 정면으로 대치되는데 스탠리는 블랑시의 표현을 빌자면 ‘짐승처럼 행동하고, 짐승 같은 습성을 가진 아직 인간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 이하의 뭔가가 있는 석기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저자테네시 윌리엄스출판민음사발매2007.11.20.



살아남기 위해 적절히 타협한 동생 스텔라와 달리 블랑시는 영어 선생님으로 머리는 지식으로 가득하고 가슴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가족의 연이은 죽음과 파산이라는 현실에 맞서 살아가기에 블랑시는 자신의 손과 발을 움직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나비 날개가 부드러운 색을 띄우고 빨간 전구 불빛의 진실을 은은하게 보이기 위해 종이 갓을 씌우듯’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도 있다. 폭력적인 남편 스탠리에게 구타를 당하는 동생을 보며 블랑시가 고안해 낸 방법은 우연히 길 가다 만난, 유전으로 갑자기 부자가 된 셰프 헌틀리에게 전보를 쳐서 가게를 하나 내 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다. 로렐이라는 마을에서 이런 식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마을에서 쫓겨나온 블랑시, 이런 내막을 조사 끝에 알게 된 스탠리는 블랑시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친구 미치에게 블랑시의 과거를 모두 이야기하고 블랑시는 마지막 남은 구원 방법이었던 미치와 헤어지고 스탠리의 폭력에 쓰러지면서 불안과 분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만다.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1947년이면 여성의 지위과 사회적 활동이 상당히 제약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한 때 잘살았던 몰락한 집안의 딸들 중 한 명은 짐승같지만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적당히 그의 폭력을 참아내며 주부로 살아간다. 다른 한 명의 딸은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마법과 환상에 젖은 채 그것과 현실과의 괴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만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야 둘 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특히 블랑시가 가진 삶에 대한 태도는 동정도 가지 않고 이해도 가지 않는다.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변의 남자를 통해서만 해결을 하려고 하는 태도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어서 블랑시에게 연민을 보낼 수가 없다.


모든 당시 미국 사회의 여성이 블랑시로 대표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굳이 여성이라는 틀보다는 전후 패러다임이 바뀌는 미국 사회에서 과거의 영광(블랑시)과 변화하는 현실(스탠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그랬기에 이 희곡은 당시 연극으로 상영되어 855회의 연속 공연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이 작품을 읽은 나로서는 1947년과 그 즈음의 대한민국 사람, 여성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제대로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붙이고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며 삶을 살아나갔던 우리의 할머니, 어미니들은 마땅히 더욱 칭송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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