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와 현대 사회의 '효'에 대한 소회
5월이다. 5월은 행사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 날까지 이어지는 국가적 행사에 대한민국 사람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 5월은 바쁘다. 여기에 나는 두 개의 행사를 더해야 한다. 친정엄마의 생일과 시엄마의 생일이 그것이다.
거주지는 경기도이고 친정과 시댁은 각각 경남의 어느 도시에 있어서 5월은 최소 두 번은 고향에 내려간다. 친구들은 아직 거의 고향에 살고 있다. 나는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일타쌍피로 행사를 두 개 준비한다. 최소의 이동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려는 속셈 때문이다.
친정엄마의 생일과 어버이날을 겸한 행사로 고향을 내려갈 때 고등학교 친구들 계모임을 진행하려고 친구들에게 가능한 날짜를 물어보았다.
"5월 4일에서 6일 휴일 사이에 다들 시간이 어때? 나 이때 내려가는데 계모임 할 수 있나?"
단톡방에 글을 올리니 주르르륵 답글들이 올라온다.
"난 그때 진주 시댁에 가야 된다. 어버이날이 평일이라서."
"어버이날이라고 친정 식구들 다 모여서 같이 밥 먹기로 이미 선약이 됐다."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목포에 사는 남동생이 주말에 온다네. 우짜지"
"대체 휴일 연휴라 10년 만에 가족여행 가기로 했다. 다른 날 안될까?"
내가 우리 엄마 챙기듯, 친구들도 그네들 엄마 아버지 챙긴다고 바쁘다. '효'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주름잡고 있다.
주말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의 엄마는 지금 요양원에 있다. 나이 많은 오빠와 언니가 둘 있지만, 가정 형편과 거주지와의 거리를 이유로 친구의 엄마는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와 약 한 시간 반을 만나는 동안 친구의 전화는 적어도 일곱 번 정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일곱 번 전화가 와도 친구를 발신인을 쓰윽 한번 보더니 전화를 받지 않고 그냥 탁자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상담 문의 오는 고객일 수도 있잖아?"
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전화를 안 받는가 해서였다.
"엄마야. 안 받아도 된다. 거의 10분 간격으로 매일 이런 전화를 해서 이젠 전화와도 안 받게 됐다. 이따 저녁 무렵에 한 번만 받으면 된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요양원에서 심심한 엄마는 대화의 상대를 찾아 자식들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건다고 한다. 전화의 용건은 신세한탄이다. 친구의 엄마는 녹음한 듯한 내용을 틀어놓은 듯한 똑같은 내용 똑같은 말투로 자식 넷에게 전화를 건다. 초기에는 효자 노릇을 한다고 전화 응대에 최선을 다했지만 오는 전화를 다 받다간 생업에 지장이 되었기에 지금은 엄마 전화가 기피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전화기를 엎어 놓은 친구의 표정에는 많은 생략의 말이 담겨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생신이라 친정 식구들이 다 모였다.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조용한 찻집에 가서 화목의 시간을 가졌다. 화목의 시간에는 으레 옛 시절 이야기가 대화의 중심을 차지하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엄마의 고생담이 대부분이다.
"20살에 시집와 보니 쌀독에 쌀은 없고 시아버지는 품을 팔아 하루 양식만 사 오고, 시엄니는 방에 가만히 앉아 주는 밥만 얻어먹고. 시집 안 간 시누이 일곱이 시집갈 때 큰 일은 내가 싹 다 치르고, 너희 할아버지는 말년에 풍이 와가 내가 똥오줌 다 받아내고. 너희 할머니 88살에 죽을 때까지 내가 다 모시고 살았고. 아이고, 내 고생한 거는 누구 알아줄까!"
이 레퍼토리에 살을 조금 더 붙여 30분짜리가 되기도 하고, 3시간짜리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3시간짜리 무용담을 무성영화를 읊어주는 변사 이야기 듣듯이 열심히 들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오 년이 지나고 이제 거의 십 년 정도 되다 보니 자식인 우리들은 엄마의 스토리에 과감히 가위질을 하며 30분용으로 편집을 시도한다.
자신의 고생을 몰라주는 것 같은 기분에 엄마는 우리의 편집질에,
"20년 넘게 시부모 수발을 했다. 요새 것들은 다 도망갔을 거다. 내나 되니깐 참고 살았지!"
라며, 자신의 과거는 추켜올리고 우리의 현재는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시하였다.
우리는 엄마의 일설이 더 길어질까 봐 서로 눈을 껌뻑거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맞다 맞아. 엄마 나 되니깐 그런 수발 다 했지. 수고했다. 수고했어."
엄마는 스무 살에 시집을 왔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동갑으로 나이 육십이었다.
내 할아버지는 팔십 한 살에 돌아가셨다. 엄마 나이 마흔이었다. 할머니는 칠 년을 더 사시다가 팔십 팔세에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는 마흔일곱이었다. 마흔일곱은 장년의 나이로 아직 노화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엄마의 무릎과 팔목은 건재했다.
마흔일곱부터 팔십 육세인 지금까지 거의 사십 년 동안 엄마는 부양하는 시부모 없이 당당한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부양할 가족은 오로지 자식뿐이었다.
지금 나의 엄마는 팔십 여섯. 엄마의 큰 아들인 오빠는 육십 다섯, 올케는 육십 넷이다.
오빠는 고혈압에 당뇨에 고지혈증 같은 몸 안의 병으로 온갖 약과 함께 살고 있다. 재작년에는 오십견으로 양쪽 어깨를 모두 수술했다. 오빠도 이제 노인이다. 올케는 오랜 기간 동안 물리치료사를 하면서 많이 서 있어서 무릎과 발목이 팔십 대 노인과 같은 수준이 되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오빠 내외도 엄마에게 육체적 물리적 부양이 어려운 처지이지만, 자식 된 도리는 다 해야 한다는 '효' 사상에 충심으로 엄마를 케어하고 있다.
엄마는 수시로 나에게 당부한다.
"시댁에 자주 전화드려라. 자식이 전화하거나 찾아오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용돈도 종종 드리고."
세상의 모든 나이 든 부모가 마치 당신 스스로인 듯, 젊은 사람들에게(5~60대인 우리)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당부하고 세뇌한다. 부모에게 효도를 잘해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종교의 교리처럼 믿고 설파하는 것이다.
아주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던 효도의 이념에 대하여, '왜 꼭 효도를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요즘 든다.
흔히, 효는 유교 이념의 주요 논리라고 한다. 유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공자는 기원전 500년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사람이 만든 논리가 유학이라는 거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와 효도는 조선시대의 유교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되고 심오해진 송나라 주자학이 조선에 건너와 근본주의 유교가 퍼지게 된 것이다. 유교는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기치아래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주된 이론이다. 여기에 군사부일체라는 논리가 더해져 임금과 부모와 스승은 한 몸이며 따라서 부모와 스승에게도 충성, 즉 효도와 공경을 절대적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 논리가 절정이었던 조선시대에 사람의 평균 수명은 서민의 경우 35세였다. 잘 먹고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받았던 국왕조차도 평균 수명은 46세였다. 사람이 자산이고 전부였던 시절, 아이는 많이 태어났다. 절대적 인구는 지금보다 압도적으로 적었을지 몰라도 젊은 인구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멀리 조선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시계를 50년만 뒤로 돌려보자. 197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는 약 3천만 명이었다. 고령화율은 3.1%였다. 1970년 기준 전 인구의 중간 나이는 18세였다. 젊음이 판을 치던 시기, 길거리와 가정에선 노인을 찾기가 어려웠고 몇 안 되는 어르신에겐 그들의 경험과 연륜에 존경을 표시하는 게 당연했다. 희소성이 가치를 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이 든 어르신은 희소성이 있었고 소수였던 그들은 약자였다. 희소성과 소수성을 모두 지닌 어르신을 우대해 주는 '효'는 당연히 가져야 할 미덕이었다.
2022년으로 돌아와 보자.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 명을 넘었고 고령화율은 1970년보다 6배나 증가한 17.5%나 되었다. 따라서 중위 연령도 높아졌는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중위 연령은 43.7세이다.
1970년 대비 인구는 1.7배가 늘었는데, 고령화율은 7배가, 중위 연령은 2.3배가 증가하였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이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희소성도 사라져 가고 있으며, 대 놓고 약자라고 부르기도 애매해졌다. 오히려 한해한해가 갈수록 노년은 권력이 되고 있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를 수도 있다.
한 달에 한 번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점까지 간다. 지하철 객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달에는 기차 한 칸에 탄 사람을 모두 헤아려 보았다.
기차 한 량에는 앉은 사람 서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대략 5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내 눈으로 판단했을 때 7~80대 사람이 절반이었고 5~60대가 남은 절반의 2/3쯤 되어 보였다. 객차 한 량에 탄 20대는 3명이었다. 8~1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한 명 타고 있었는데 30대로 보이는 아빠와 함께였다.
몇 안 되는 객차의 좌석에는 7~80대의 어르신들이 자리에 다 앉아 있었다. 8살 아이는 지하철 쇠막대에 동동 매달려 지하철이 서고 출발할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아빠는 한 팔과 한 다리로 아이를 붙잡고 있었고 남은 한 팔은 세모난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이 광경이 나는 불편했다. 아이가 소수이고 약자였는데 노약자석에라도 아이를 앉혔야 되는 건 아닌지, 어른들이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물론 나만 불편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변화는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변화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사회의 트렌드는 젊은이들이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다. 패션, 취향, 자본 유형의 선호, 식생활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빨리 변화한다.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의 이념도 트렌드에 맞춰 빠른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가부장제가 아직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남성 중심의 문화가 팽배했지만, 이제는 가부장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고 사회 곳곳에 여성의 역할이 성장 일로를 걷고 있다.
조직에서 연장자들은 '꼰대'라는 말을 안 듣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나이 든 티를 안내기 위해 젊은 생각을 탑재하기 위해 많이 배우고 많이 인내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를 관통하는 이념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효'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주요 이데올로기로 우리 사회에 굳건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버이날이면 용돈과 선물을 그득 들고 부모님을 찾아봬야 하고, 아픈 부모와 병원에 동행해야 하며, 조석으로 식사로 챙겨야 한다. 안부 전화를 자주 못하면 마치 슈퍼에서 과자를 훔치는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남들이 불효한다고 뭐라 할까 봐 눈치가 보인다.
이제 '효'는 미덕이 아니라 '죄책감'이 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죄책감을 숨기기 위해 모두가 '효'를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어머니 생신을 위해 왕복 12시간을 달렸다. 의무감에 절반은 억지로 다녀온 길이었음에도 남들에겐 '난 이 정도도 한다'는 으스댐을 가지는 나 자신이 가소롭다.
사회가 바뀌면 전통도 인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효'에 의무감을 가지는 내 친구가,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내 친구가, 엄마에게 사랑보다 미움이 서서히 더 커지는 걸 숨기려는 내가 안타깝다.
그냥 우리 내 부모든 남의 부모든 강요된 '효'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행하면 되지 않을까.
5월, 행사의 달을 보내면서 욕먹을 각오로 마음을 한번 털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