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비극이 나라의 비극이 되다 - <창경궁 문정전>
옛날 옛적에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에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가 나이 40세를 막 넘겼을 때였습니다. 드디어 나라의 대통을 이을 왕자가 태어났는데, 역사는 그 왕자를 사도세자라고 불렸습니다.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이라고 지어졌고 이선이 태어난 것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죽은 지 8년 만이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정비인 중전의 아들이 아니라 후궁 영빈 이 씨가 낳은 아들이었지만 왕실의 정통성과 법도에 따라 태어난 지 백일만에 중전인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양자로 입적되었을까요? 이선이 태어났을 때 영조의 나이는 마흔두 살이었고 조선시대의 마흔두 살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되는 나이었습니다.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 후계 구도를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왕실과 선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을 세자의 자리를 빨리 정해고 싶어 했습니다. 이선을 중전의 양자로 입적하고 일 년이 지나고 그의 나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이선은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영조는 세자가 늦게 정해진 만큼 세자를 빨리 제대로 공부시켜서 더욱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세자 선은 아주 영특하여서 3살 나이에는 읽기 어려운 <효경>을 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자는 공부 머리는 아버지 영조를 닮았을지도 모르지만, 성정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자는 자랄수록 공부보다는 밖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임금이 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며 글을 읽기를 명령하였고 아들이 야외활동 하는 것을 못마땅해하였습니다. 영조는 글공부보다 야외 활동에 열중인 세자를 자주 혼내었습니다. 야단이 잦아지고 혼내는 강도가 세어지니 세자는 아버지를 아주 무서워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잘 쳐다보지 못하고 질문에 제대로 답을 올리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조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아들이 더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악순환이 반복되게 된 것입니다.
세자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심해져 의대증이라는 정신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의대증이란, 옷에 대한 강박증이 생겨 어떤 옷을 입어도 실수했다고 생각이 들어 옷 한 벌을 입을 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러 벌을 갈아입어야 하는 일종의 정신적 편집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던 사이, 영조는 경희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창경궁에서 세자는 자유를 만끽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눈 밖에서 멀어지자 세자는 아버지 몰래 관서지방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기생들을 궁으로 불러서 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경희궁으로 아버지 어머니께 문안도 올리러 가지 않았습니다.
세자의 비행과 정신병증이 심해지자 세자에 대한 소문은 한 입 두 입을 건너 궁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세자의 증세를 놓고 대신들은 말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주요 세력이었던 노론은 세자의 증세를 놓고 한 나라의 세자가 저러면 되느냐, 세자는 나라를 다스릴 인물이 되지 못한다며 세자를 깎아내리기 바빴습니다. 소론 일부와 남인들은 아버지 영조가 아들에게 심히 대하는 것 같다며 세자의 편을 주로 들었습니다. 세자에게 동정심을 가진 무리를 시파라고 부르게 되었고, 영조를 이해하는 노론들을 벽파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영조는 아들에 대한 괘씸죄를 차곡차곡 쌓아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기행 10가지에 대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세자의 비행을 눈치는 챘으나 상세한 내용까지는 모르던 영조는 그 상소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괘씸죄에 상소의 내용까지 더해 영조는 아들에 대한 분노가 화산의 용암처럼 끝 모르게 끓어올랐습니다.
그 사이 영조의 첫 번째 정비인 정성왕후가 사망하였고 그의 빈전을 창경궁 문정전에 준비하였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정성왕후의 신주가 모셔진 문정전으로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부름에 뭔가 짐작을 한 것 같은 처연한 얼굴을 한 세자가 나타났습니다. 세자를 보자마자 영조는 홀연 문정전 문을 네댓 겹으로 막으라고 명하더니 이어 말했습니다.
"땅에 엎드려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리라. 그리고 자결해라!"
영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죄는 무엇입니까?"
라고 반항도 해보았고,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
라며 빌어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결연한 몸가짐으로 세자의 폐위를 명하고 자결을 재촉하였습니다.
설마 명령이 진심일까, 사도세자는 머뭇거렸습니다. 동시에 저항도 해보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면 영조는 신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뒤주, 뒤주를 가져오라.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라."
문정전을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은 영조의 강경한 명령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세자의 고통과 폐위를 내심 즐기던 노론들은 이 모습을 방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세자는 뒤주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8일이었습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시간입니다. 8일 동안 영조는 아들에게 물 한 모금 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혹여나 누가 풀어줄까 뚜껑을 열고 나올까 뒤주에 갇힌 며칠 뒤에는 끈으로 뒤주를 꽁꽁 묶어두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모습을 본 세자의 아들은 할아버지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며 빌었습니다.
"할바마마, 제가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제발 아바마마를 살려주시옵소서. 아버지께 물 한 모금 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영조는 사랑하는 세손의 절규에도 끄덕하지 않고 8일 동안 아들을 뒤주에 가둬 놓았습니다.
8일 뒤, 뒤주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습니다. 흔들어 보아도 소리쳐 불러 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뒤주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끈을 풀고 뒤주를 열었습니다.
세자의 몸은 뒤주 속에서 구겨지고 꼬인 채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세자가 죽었습니다.
뒷날, 영조는 아들의 시호를 사도(思悼-잘못을 반성하며 일찍 죽은)로 지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앞뜰에서 8일 만에 죽었다.
그의 아들이자 영조의 세손 이산은 15년 뒤에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시호를 사도에서 장헌으로 올려 바꾸고 아버지를 기리는 많은 작업을 시행하였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는 이때의 일들은 '한중록'에 기록하여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