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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r 27. 2021

앤서니 버지스 -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라는 영국 작가가 쓴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로 더 유명하다. 나도 처음에는 <시계태엽 오렌지>가 영화인 줄만 알았고 소설 원작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썸네일을 보면 사람의 머리에 어떤 기계 장치를 씌우고 눈을 강제로 벌린 장면이 나온다. 이 썸네일을 보고 나는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SF 영화라고 생각했다. SF 취향인 나는 그래서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매운 떡볶이를 시켰는데 나온 것은 짜장 떡볶이여서 끝까지 먹어야 할지 취향을 존중해서 그만 먹어야 할지 고민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짜장 떡볶이를 한입 두입 먹게 되었는데 먹어보니 뜻밖에 먹을 만해서 계속 먹게 되는 그런 상황이 연이어졌다. 즉, 매운 떡볶이는 SF인 내 취향이고 짜장 떡볶이는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SF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이 발표된 건 1962년, 냉전이 한창일 때였다. 소련이 건재하여 미국과 첩보 대결과 전쟁 준비 경쟁을 벌였고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죽의 장막 안에서 지네들끼리 살던 시절이었다. 저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를,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을 존경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나치를, 그 후에는 소련과 중공의 전체주의를 보면서 앤서니 버지스는 한 사람의 폭력과 전체의 폭력 그리고 국가의 폭력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다양한 집단의 폭력에 대하여 그린 소설이다. 고 나는 생각했다.



[알렉스의 청소년 비행 - 개인의 폭력]

15살 알렉스는 양친이 다 살아있고 직업도 있어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아이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우리 어릴 때 한창 유행하던 본드 흡입과 비슷하게 우유속에 약을 타서 마시고 밤거리를 다니며 생 양아치들이나 할법한 온갖 종류의 폭력을 저지르고 다닌다. 사람을 이유 없이 때리고 면도날로 긋고 강간하고 돈을 훔친다. 이유는 없다. 그저 악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아이이다. 전담 경찰이 타이르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부모님이 구슬려도 보지만 알렉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살며 폭력을 일삼는 하루하루가 알렉스에게는 '작지만 용감한 영혼들이 커다란 기계에 맞서 싸우는 역사'라고 생각을 하였고 단지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것뿐이었다.


하지만 알렉스와 그 친구들(딤, 피트, 조지)이 일삼는 폭력에 보모님이 가슴 아파하고 길 가던 행인이 아파했으며 모드는 이웃이 죽었다. 알렉스를 전담하던 경찰관은 "너는 좋은 집에, 사랑을 주는 부모에, 또 그다지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졌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우리는 이 문제를 거의 한 세기 동안 연구하고 있지만 더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다."라며 알렉스를 깨우쳐주려 하고 폭력의 원인을 알아내려 하지만 알렉스 전담 경찰관은 한 세기 동안의 성과가 없던 연구와 마찬가지로 알렉스에게서도 해답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폭력은 20세기를 거치고 21세기 요즘 사회로 오면서 더욱 강도가 세어지고 있다. 알렉스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폭력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학생이 선생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아랫동 사람이 윗집 사람에게 폭력은 일상에서 난무하고 있다.


작품에서 알렉스의 폭력에는 이유가 없다. (내 생각에 알렉스는 사이코패스인 것 같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에는 나름의 이유가 대부분이다. 돈이 없어서, 말을 안 들어서, 대들어서, 층간 소음 때문에 그리고 나보다 잘나서. 폭력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빈번한 폭력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는 폭력의 처벌과 금지를 원했다. 누구에게? 국가 혹은 정부라는 더 큰 기관에게 공식적으로.



[루드비코 요법 - 국가의 폭력]

이웃과 불특정 다수에게 폭력을 일삼아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입힌 알렉스는 결국 감옥에 갔다.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은 죄가 너무도 컸기에 소년원을 건너뛰고 바로 감옥으로 직행했다. 엄청난 죄에 대한 대가로 14년형을 언도받은 알렉스는 나름 성실히 감옥생활을 한다. 반성이나 뉘우침은 없는 채로.


감옥에서 2년이 지난 어느 날, 알렉스는 의도치 않게 또다시 폭력 사태에 얽히게 되고 그로 인해서 루드비코 요법이라는 것을 받는다. 이 치료는 강제적이고 반인권적이긴 하지만 효과가 아주 좋아서 단 며칠만 치료를 받아도 폭력의 'ㅍ'만 듣거나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신체가 이상 반응을 일으켜 주먹은 앞으로 내뻗고 싶어 안달이지만 머리가 뻗으려는 주먹을 자제시켜 버리게 되는 그런 요법이다. 실은 루드비코 요법의 첫 번째 참여자가 바로 알렉스인데 이 치료법을 개발하고는 대상자를 찾지 못하다가 알렉스에게 출소를 조건으로 치료를 시행하게 되는 것이다. 알렉스가 루드비코 요법의 대상자로 정해진 것은 그의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폭력성과 인간성 때문이었다. 이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는다면 알렉스라는 사람은 평생토록 나쁜 짓만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루드비코 요법을 개발하고 시행하고 모니터링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바로 국가와 정권이다.


선거를 앞둔 정권은 선거에서 이겨야만 했고 루드비코 요법의 성공은 대다수 선량하게 사는 시민들에게는 유혹적인 방법이고 공약이었다. 폭력이 없는 사회라니.


대한민국은 일찍이 삼청교육대라는 폭력 대청소를 경험한 적이 있다. 깡패와 조직폭력배를 소탕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물론, 깡패와 조직폭력배를 포함한) 이 길을 걷다가 끌려갔고 혹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도 누군가의 보복성 밀고로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우리 엄마나 아버지들은 조두순 같은 인면수심의 생명체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지금도 이야기한다. "삼청교육대를 다시 맹글어야대. 그래서 저런 놈들은 싹 다 잡아서 처넣어어야대!"


깡패가 없어져서 과연 그때는 살기 좋았던, 잘 사는 시절이었을까?



알렉스와 같이 나쁜 짓을 하던 피트는 경찰이 된다. 개인의 폭력을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국가는 감옥에 가지 않고 남아있던(그마나 선한 폭력배라고 생각했을까?) 폭력배들은 경찰로 특별채용을 했는데 피트도 그렇게 해서 경찰이 되었다. 폭력을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피트는 경찰차를 타고 가다 사람을 때리는 폭력배들을(혹은 비슷한) 보면 경찰차에서 내려 폭력배들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하가 받은 폭력을 마음껏 행사한다. 길거리 폭력배들은 어떤 절차나 경고 없이 허가받은 폭력배들에게 끌려가서 폭력으로 난도질당하여 새사람이 되어야지 으슥한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다. 알렉스와 다닐 때는 무리의 꼴찌급이었던 피트는 폭력을 허가받은 후에는 알렉스보다 더 잔인하게 난폭하게 폭력을 사용한다. 왜?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허가를 받은 폭력은 정당한 폭력인 걸까? 알렉스 무리일 때의 피트는 범죄자 피트이고 경찰차를 탄 피트는 수호자 피트이란 말인가?


영화<시계태엽 오렌지> 중에서. 유투브 영상 캡처


이런 의문을 품다가 문득 나에게 묻는다. 조두순에게 루드비코 요법을 사용하여 그가 개과천선을 하게 된다면 나는 루드비코 요법에 동의할 건가? 허가받은 무자비한 폭력이 조두순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다면 나는 허가받은 폭력을 보더라도 침묵할 수 있는가?


머리가 생각하는 폭력과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폭력, 제3자와 관련되었을 때의 폭력의 사용과 나와 관련된 사건을 향한 폭력에서, 나는 머리와 가슴이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는 나를 알아챘다.



[알렉스의 자살 시도 - 민간의 폭력]

출소 후 무기력해진 알렉스는 도서관에서 한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 사람은 예전에 그가 죽도록 두드려팼던 사람이다. 그 노인을 보고 멍하니 앉아있는 알렉스가 누구인지 노인이 알아내었다. "아, 맙소사. 너, 이 못된 놈. 이제 잡았다." 노인은 도서관에서 소리를 지르며 무기력한 알렉스를 책으로 마구 팼다. 주변에 있던 도서관의 다른 선량한 시민들도 노인의 폭력에 기꺼이 즐겁게 동참했다. "죽여라, 짓밟아, 살인하자, 이빨을 차버려."라고 말하면서.


한때 나쁜 놈이었기에 도서관 직원도 방관만 하고 알렉스를 도와주지 않았다. 계속되는 폭력에 메스껍고 역거움을 느낀 알렉스는 자기가 사람을 때린 죄를 지은 것처럼 몰래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


과거의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폭력을 당하던 알렉스는 구석으로 되진 곳으로 도망을 가다가 <HOME>이라는 문패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알렉산더라는 작가가 혼자 살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알렉스의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사람들처럼 때리거나 홀대하기는커녕 "또 다른 희생양이군."이라고 하면서 알렉스에게 뜨거운 목욕물과 따뜻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그러고는 동료들에게 연락을 했다. 알렉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들은 현 정부와 대치하던 어떤 단체의 사람들. 이들은 알렉스를 도와주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알렉스는 고마움을 느끼지만 알렉스에게 필요한 건 그저 따뜻한 환대와 휴식뿐이었다. 하지만 그 단체는 알렉스를 선전물로 보고 전면에 나서기를 원한다. 알렉스는 단체 사람들에 의해 단체가 사용하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비로소 맘 편히 누울 곳을 찾은 알렉스, 하지만 밤새도록 옆집에서 들려온 클래식 음악 - 루드비코 요법 때문에 이 음악만으로도 알렉스는 죽음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 나중에 알렉스는 알게 되었다. 옆집의 그 음악은 단체에서 일부러 틀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렉스가 고통을 받아야 알렉스가 단체가 원하는 전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한 단체가 알렉스가 가장 함들어하는 것을 일부러 한 것이었다.


선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하는 폭력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아니, 허용될 수 있기나 한 걸까?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알렉스와 단체, 알렉스와 노인 그리고 선량한 시민들. 어떠한 폭력이라도 사용하면 안 되는 건지, 선한 폭력은 어느 수준까지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시계태엽 오렌지>는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자 앤서니 버지스는 전체주의의 폭력에 대하여 아마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시대를 생각한다면). 하지만 2021년 학교폭력이 대중적으로 이슈가 되고 반인륜적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현재는 전제주의적 폭력이나 국가의 폭력 같은 이슈보다는 범죄(폭력)과 처벌에 대하여 처벌의 허용과 수준에 대하여 생각할 거리를 이 책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콘텐츠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이 왜 <시계태엽 오렌지>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전체주의 시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했으니 시계태엽으로 감아야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고 오렌지는 쥐어짜면 새콤달콤한 즙이 나오는 과일이니 태엽으로 쥐어짜서 오렌지 즙 같은 생산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축했다. 그런데 223쩍 짜리 책의 222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청춘은 가버려야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피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아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아가다가 주변의 것들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222쪽)


이것을 보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일탈하고 방황하는 사춘기 아이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알렉스가 15살에 한 행동은 일탈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그야말로 스스로 '철이 든' 알렉스는 마치 책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느 것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이제 앞으로 그에게 벌어질 일이라고 말하면서.


"아,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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