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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Jul 30. 2024

히키코모리 배달부 되다 - '난 내가 부끄럽지 않아'

동굴 속 이야기 스물넷

2024년 가장 하고 싶었던 것, 간절했던 것은 아르바이트다.

그중에서도 육체노동을 하고 싶었다. 요즘 매일 땀으로 샤워하는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 기쁘다.
2023년 12월 31일. 쿠팡에서 하루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선 투잡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와 조언을 들었다. 아르바이트에 몸이 적응하고 나서 투잡을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3개월이 흘렀다. 10년 차 방구석 우울증 히키코모리가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샤워하고 쓰러져 자기 바빴고 노동의 강도에 짓눌려 '아... 이젠 무리다. 그만하자'라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첫 주엔 20-30kg의 박스를 몇 번 나르면 헉헉대고 허리를 부여잡았던 내가 이젠 연달아 40개씩 박스를 쌓는 작업에도 한숨 돌이키면 그만인 몸이 되었다. 이젠 체중도 더 이상 줄지 않는다. 오히려, 살찌는 게 걱정돼서 퇴근하고 운동삼아 도서관을 오가는 산책을 매일 1~2시간씩 하고 있다. 이젠 하루 2만 걸음을 찍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몸이 많이 튼튼해졌다.


정신적으로도 좋아졌다. 매일 여러 가지 일에 '완료'를 찍으면서 나에 대한 신뢰를 차곡차곡 쌓았고 이젠 숫자를 세는 것도 가능해졌다.

몸이 마음대로 잘 움직이니까 자기 신뢰도 높아졌다




퇴근 후 2시간가량 산책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 지금이 그때인가... 다른 일에 도전해 볼까?

그리고 도보배달을 시작했다.

놀금 휴일 하루동안 8건을 배달했다


퇴근하고 2~3시간 동안 도보배달을 했다. 보통 하루에 2~3건을 배달했고 6000원~10000원가량의 금액이 찍혔다. 최저시급 보다 적게 벌렸다. 빠르게 걷거나 뛰어야 했고 한동안 잠잠했던 무릎은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보배달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란 것을 하루 만에 깨달았다. 하지만 난 배달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달하는 모습을 교회 사람들이 본 모양이다.

세상에! OOO 형제님이 배달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도보배달을요!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이 조용히 손을 끌고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뒤 말씀하셨다. '성도분들이 배달하시는 걸 보셨다더라고요'라고 말씀하셨다. '네. 배달하고 있어요. 제 마음에 평안이 찾아들어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잠시 뒤엔 부목사님을 보았다. 그리고 따로 얘기를 꺼내셨다. '다른 분이 배달하시는 걸 보셨다더라고요', '네! 제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마음이 편해져서 배달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음. 무슨 대답을 기대하셨던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배달을 하는 모습은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이고 조심스럽게 얘기될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배달은 '그런 일까지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나요?'의 '그런 일'이란 걸 알고 있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에게도 배달은 '그런 일'로 불린다. 배달은 많은 이들에게 비천한 일로 취급받고 육체노동, 감정노동이며 사회적으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안다.

어머니가 자꾸만 배달을 그만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잘 알고 있다


나에게 배달은 신성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그 짧은 순간은 내가 느끼는 행복, 기쁨, 마음을 전해주고 돌려받는 순간이다.

순수하게 감사를 느끼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신성하지 않은 일은 없잖나?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면 에너지가 솟아난다. 장마철을 사랑한다. 그런 나에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에 번개와 장대비를 뚫고 배달하는 건 즐거운 시간이고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파리바게트에서 콜이 왔다. 매장에 가보니 오토바이로 배달하시는 분이 폭우에 미끄러져 생일 케이크를 엎었다고 한다. '안전하게 잘 부탁드려요. 많이 늦었어요. 꼭 좀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케이크상자를 큰 비닐로 감싸고 보온보냉 백팩에 넣었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조심조심 걸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온몸이 젖은 채로 아버지 손에 깨끗한 케이크를 전해드리면서 앞에 폭우로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다며 배달이 늦은 것에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을 엿본다. 생일 케이크 맛있게 드시라는 얘기로 배달건을 마무리했다.


양해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가족들의 날 선 감정을 누그러뜨릴 가능성이 내게 주어졌다.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만들 가능성이 주어졌다. 리뷰가 나쁘게 달리지 않게 만들고 착한 점주님의 걱정을 덜어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그 가능성을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


배달을 하면서 고객이나 점주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을 날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달로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배달이란 나에게 그런 의미다.




난 비를 좋아한다. 장마를 좋아한다. 씻겨 내려간 그다음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장마철 비가 그친 소강상태의 하늘도 좋아한다


10년의 히키코모리란 시간을 흘려보낸 뒤, 작은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배달을 할 수 있는 지금이 만족스럽다. 어쩌면, 다시 폭우가 몰아치고 쿠릉쿠릉 소리를 내며 회오리치는 흙탕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뭐 괜찮지 않을까 싶다.


- 올해 남은 5개월 동안 배달(전기자전거, 오토바이), 편의점, 카페, 서빙, 주방보조/조리, 건설노동, 물류, 바텐더, 철야 알바를 해보는 게 작은 목표다. 인생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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