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부엉이의 저슷두잇: 연구자의 일에 대하여
많은 분야의 학문이 실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을 기초로 합니다. 연구자들은 연구의 결과가 현장에 잘 반영되기를, 현장의 실무자들은 현장에 적용 가능한 의미 있는 연구가 나오기를 바라죠. 하지만 실제로 연구와 현장의 소통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물론 인류학이나 사회학 연구자처럼 처음부터 현장에 들어가서 현장을 살아내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의 현장은 책상이며 주 업무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므로, 어떤 방식으로 현장에 접근해야 할지 어렵기만 합니다. 매번 관련 분야의 실무자들에게 인터뷰나 자료를 요청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요. 그러다 보면 연구 결과가 현장에 반영되는 건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현장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연구자들을 현장이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저는 3년 정도 공부를 한 뒤, 동일한 기간 동안 관련 현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 현장으로 갈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죠. 연구를 통해 쌓아 온 지식과 방법론을 활용해 현장의 지식을 잘 정리해내고, 그 결과를 다시 현장에 적용해내는 현장의 연구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는 비단 저만의 포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석사 과정으로 북한학을 전공했는데요. 함께 공부한 학생들 대부분이 이미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북한학은 다른 기초 학문들을 딛고 있는 응용 학문인 데다가 제가 다닌 대학원의 특수성도 있었죠. 시민단체 활동가, 전문가, 교사, 기자, 공무원, 군인, 사회복지사, 종교인, 금융업, 당직자 등. 그동안 만나본 적 없는,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분들은 연구직을 희망해서 학위를 따러왔다기보다는, 현장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것, 혹은 본인의 직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저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장의 지식들을 연구를 통해 풀어내고 발전시키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습니다.
현장과 연구를 병행하리라.
현장을 기반으로 연구적 요소를 활용하고,
연구를 통해 현장의 발전을 도모하리라!
라고 생각한 저의 포부는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점차 옅어져만 갔습니다. 오죽하면 <왜 현장과 연구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니까요? (이런, 뼛속까지 연구자..) 현장과 연구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걸까요?
가장 큰 문제는 '데이터'입니다. 데이터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질적 연구를 한다 해도 결국 현장의 실무자들이 일하는 만큼 현장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만들어낸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데이터란 단지 매출/매입, 성장률과 같은 숫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형식을 갖춘 기획서와 보고서, 잘 설계된 프로그램 평가지, 정책에 대한 실무자의 평가도 데이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데이터가 통일된 언어로 작성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국 단위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기관 내에서도 데이터의 형식은 들쑥날쑥합니다. 예를 들어 비영리단체의 데이터는 지원을 받은 기관의 언어로 작성됩니다. 정부, 지자체, 민간재단 별로 형식이 모두 다르죠.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서 별로, 실무자 별로 작성되는 데이터의 언어가 다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데이터를 작성하는 것이 실무자들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데이터를 생산해내는 것은 또 다른 노동입니다.(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요즘 데이터세를 걷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만큼 데이터가 지금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현장의 실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사유할 시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 바쁘거든요. 데이터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실무자들의 '업무'가 아니니, 이러한 일은 실무자들에게 '추가 업무'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 또한 실무자의 업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무자들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를 기본으로 하여 조직의 인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거죠.(꿈만 같은 이야기네요.)
그러나 데이터가 잘 축적되더라도 해당 기관/기업의 내부 자료이다 보니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데이터는 공공을 위해 공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든,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 수립을 위해서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젠다를 세우기 위해서든, 사회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든, 각 기관과 기업의 자료는 일정 범위 내에서 공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데이터를 공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공에 필요한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과 기업의 기밀을 공개하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공개할 수 있는 데이터는 꽤 많습니다. 반드시 연구와 현장은 함께 가야만 합니다. 실무자들의 경험이 기록으로 데이터로 쌓이지 않는다면 연구자들은 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대학원에서 막상 많은 양의 논문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잘 몰랐습니다. 이 논문이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얼마나 난해하게 읽힐지를요. 저는 현장에서 북한이탈주민과 남한출신주민 간 통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연구가 있었기에 저는 프로그램을 짤 때 그 논문들을 참고하고자 했죠. 하지만 막상 그 연구들을 현장에 적용하려고 하니 피상적이고 거시적이어서 변화 포인트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은 양의 연구가 정책 제언에 가까웠고 막상 현장을 운영하고 있는 실무자들은 연구에서 필요한 영감을 찾아내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애초에 연구란 것이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죠. 하지만 만일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읽고 적용할 수 있는 데도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연구의 '독자'는 누구일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저는 연구자가 어떤 '전제'를 너무 쉽게 해 버렸을 때 현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은 상당히 복잡하죠. 그 복잡함을 단순하게 정리해버린다면, 그리고 그 단순함을 실무자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실무자들이 그 시각으로 현장을 인식하고 다시 그걸 현장의 지식으로 재생산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무자들에게 현장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현장에서 개입이 가능한 지점을 설명해주는 연구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한국의 사회과학 분야의 많은 연구가 정책 연구 위주로 흘러갑니다. 잘 만들어진 하나의 정책이 열 명의 실무자 안 부러울 수도 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죠. 정책을 통해 변화시킬 만큼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영감을 주는 연구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적용 가능한 영감'이, 굳이 사회복지학을 예로 들자면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은 대상자들이 말하지 않는 상황까지 미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와 같은 교훈적 영감이어서는 안 됩니다. 실무자들의 개인의 노력보다는 조직적으로 그리고 업무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연구가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다면 현장에서도 논문을 더욱 많이 참고하겠죠? 그렇게 되면 모두가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거고, 연구자들도 더 노력해서 좋은 연구를 하지 않을까요?(이렇게 선순환! ⤴️) 너무 어렵고 꿈같은 얘기지만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연구와 현장이 잘 소통하는 좋은 사례를 가져와보도록 할게요. 그럼 오늘도 여러분의 논문을 참고할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열심히 연구합시다. 부엉!
글. 수리부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