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찾기 (3)
<홀로 선 자본주의>의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오늘날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 체제의 대안은 아직까지 없다고 본다. 마크 피셔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겠지만, 불평등을 연구했음에도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밀라노비치의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불평등을 연구하여 유명해진 토마 피케티는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홀로 선 자본주의>의 전반부(1,2,3부)는 자본주의의 2가지 유형을 구분하고 설명한다. 하나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leberal meritocratic capitalism’고,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political capitalism’다. 이 책의 후반부(4,5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한다. 전반부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지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찾기’의 부제에 걸맞게 후반부를 중심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오늘날 극심해진 불평등과 기후변화로 인해 자본주의의 어두운 부분이 부각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밀라노비치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가 말한 ‘온화한 상업’에서 찾는다. 몽테스키외는 상업 사회는 성공을 위해 타인을 기쁘게 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친절함이 인간 행동에 스며든다고 생각했다. 또한 순수한 상업 사회는 계층이나 인종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지 않는다. 돈은 여기서 평등 장치로 기능한다. “돈은 성별, 성적 취향, 장애 정도, 인종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점진적인 기회의 평등화를 가져다준다.”(341쪽) 그러나 다른 가치가 사라지는 대신에 오로지 ‘돈’이 중요해진다. 오로지 부에 따라 사회 계층 구조가 결정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를 획득하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꿀벌의 우화>라는 책으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맨더빌은 이런 변화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익이 될 거라고 보았다. 개인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악’으로 볼 수 있지만, 개인의 악덕을 잘 발현한다면 사회의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내포하는 뜻이기도 하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욕심이 공공의 이익에 자연스럽게 부합하게 된다고 여겼다.
밀라노비치는 아담 스미스의 이런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평가한다. 일부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확실히 반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도를 넘는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 실제 자본주의가 진화해 온 역사적 방향도 ‘자유 시장’이 아닌 ‘조정 시장’이었다. 국가의 법적 규제와 개인의 자율적 규제는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탐욕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법적 규제와 자율적 규제의 효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국내법을 피하는 경로가 생겨났고, 자율적 규제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사회계약의 영향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줄어들고 있다. 밀라노비치는 이 같은 변화가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돈’이 지고의 가치가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외 사회윤리적 가치는 경시하게 된다. 밀라노비치는 “누구나 생존을 위해, 여타 모든 사람처럼 같은 수단과 같은 (비도덕적) 도구를 사용해 싸워야”(354쪽) 하는 오늘의 현실을 짚는다. 돈 외에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면 금전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를 감당할 바보 같은 개인 혹은 조직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모두 어느 정도는 부도덕해지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밀라노비치는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대안이 아직까지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시도들이 경쟁 혹은 생존을 이유로 결국엔 돈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타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상업화된 세계를 거스르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함께 철수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따로 떨어진 외딴 공동체로 도피하든지, 또는 국가와 같은 덩치 큰 집단의 경우 기꺼이 고립된 외톨이가 됨으로써 상업화된 세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 지금의 세계에서 철수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업화된 세계가 주는 편리함을 포기하고, 훨씬 더 낮은 생활수준을 감내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소유욕을 통해 사회화됐고, 모든 목표가 거기에 맞춰져 체질화됐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358쪽
밀라노비치의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적 전망에는 인간은 합리적인 개인(호모 이코노미쿠스)이라는 경제학의 오래된 전제가 엿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이미 꽤 알려졌다. 행동경제학의 연구들은 인간이 때로는 상대방을 위해서 혹은 감정적 이유와 편향에 의해서 합리적이 않은 선택도 한다는 걸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비치는 인간의 본성이 “계산기”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우리의 일상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관심까지 상품화하는 단계로 나아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이 회사인 경제 체제 속에 있다면,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이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팔 것이다. 완전한 자본주의 유형이다. 우리 이웃은 무료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구도 당신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배우자와의 성관계에서도 당신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유형은 현재 우리 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며, 앞으로 길게 보아 이런 자본주의적 운영은 지속될 것이다. 373쪽
끝없는 상품화가 자본주의에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밀라노비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전제를 다시 상기한다. 삶이 아무리 피상적이고 상품화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자유를 누릴 것이다. 경쟁과 생존이라는 구조 속에서 결국 모두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고, 아무런 인간관계는 남지 않아도 되는 깨끗하고 깔끔한 세상이 열린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는 “부의 유토피아와 함께, 인간관계의 반이상향, 즉 디스토피아”(376쪽)다.
밀라노비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냉엄한 지적과 달리 기술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편이다.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가 많이 사라진다 해도, 전혀 다른 영역에 일자리가 생기고 있다고 말한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는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의 근거가 되었던 제번스의 역설은 그에게 오류로 보인다. 종이 대신에 아이패드를 쓰면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밀라노비치가 보는 세상에는 자연이라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앞으로의 자본주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은 기후위기가 아니라 혹시 모를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같은 기후변화 세계 곳곳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밀라노비치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시스템에서 성공한 개인에게는 유효해도, 실패한 개인, 시스템 외부에 서게 된 개인에게는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물론 자본의 논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행동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 그 역사적 사례 중 하나가 공산주의 운동이다. 밀라노비치는 공산주의 운동이 결국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도운 의미가 있다고만 결과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이 왜, 그리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는지에 대한 동기는 묻지 않는다.
나는 그 운동의 저변에 '이야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미래를 그린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간절히 원하고, 또 그 때문에 살아간다. 인간은 ‘합리적인 인간’일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밀라노비치가 지적한 대로 현재 자본주의는 계속되는 불평등의 심화로 전망이 그다지 밝다.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암울한 전망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다. 그래선지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렇게 마음이 헛헛했나 싶다.
읽은 책
홀로 선 자본주의, 브랑코 밀라노비치, 정승욱 옮김, 세종서적, 2020
글. 김소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