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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Nov 24. 2021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찾기 (2)

코로나19 궁금했다.  이런 전염병이 전세계를 바꿔버린 건지.  갑자기 어느 날부터 마스크를 써야만  건지. 대체  병은 어디서  건지.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전염병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코로나19 인간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발달하는 이상, 언제고 찾아  위기였다는 것을. 전염병은 인류 역사상  존재하는 위험이었지만, 지난  십년간 국제화의 영향으로 더욱 전염병의 위기에 취약해졌다는 것을.


코로나19의 등장과 함께 이상 기후 현상이 더 자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9년 아마존 산불 사태과 동아프리카의 메뚜기떼들. 2020년에 한달 넘게 이어진 기록적인 한반도 장마도 충격적이었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기후위기, 이 현상을 뭐라고 부르든 이 모든 변화는 현재진행형이었고,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는 당연히 코로나19였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구수와 생활 수준 증가는 결국 더 많은 자원과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어떤 경위로 발생하였는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이는 결국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전염병이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인류 사회의 성장과 풍요의 이면에는 늘 환경 오염과 파괴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모든 풍요와 편리함을 뒤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한다면, 지금부터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공존하는 가운데, 누군가 마르크스를 등에 업고 급진적인 주장을 들고 나왔다.


사이토 고헤이는 독일 베를린에서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새롭게 추진 중인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 젊은 지식인은 지금의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과감하게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거대한 문제에 똑 떨어지는 답이 있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그 과감성과 대담함에 혹해서 책을 들어보았다.



저자의 메시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부 선진국들(Global North)의 풍요로운 생활은 후진국(Global South)의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하고 오염과 위험을 전가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슈테판 레세니히는 이를 '외부화 사회'라고 비판했고,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이런 선진국의 생활양식을 '제국적 생활양식'이라 불렀다.) 이러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불평등한 지배종속 관계는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이런 자원 수탈과 위험의 대가인 기후 위기가 후진국은 물론 선진국에게도 닥치고 있다.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가 심해질수록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당성이 흔들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역사의 갈림길이 열릴 것이고 크게 4가지 미래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 '탈성장 코뮤니즘'이 가장 평등하고 바람직한 대안일 것이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114쪽



고헤이가 설명하는 기후 위기 이후 4가지 선택지를 들여다보자. 기후 파시즘기후 마오쩌둥주의는 기후 위기로 인해 국가권력이 강해진 선택지다. 기후 파시즘은 기후 변화에 미온적이며 경제 정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계급의 이해만을 반영된 독재국가다. 기후 마오쩌둥주의는 가후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를 뒤로 미룬 관료 중심의 독재국가다. 세번째는 기후 위기로 사회가 혼란에 빠져 국가 권력이 붕괴하게 되고, 오직 개인의 생존만이 중요해진 최악의 미래인 야만 상태다. 마지막에 남은 네번째 선택지는 우측 하단의 X. 이 자리에 독재국가도, 국가권력의 붕괴도 아닌 자연과 공존하기 위한 자율적인 집단 정치경제체제인 탈성장 코뮤니즘이 위치한다.


이 시나리오가 조금 무섭진 않은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가면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는 필연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선택지들은 현재 체제의 기능 정지 혹은 붕괴를 너무 당연하게 상정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류는 '탈성장 코뮤니즘' 체제가 아니면 어찌됐든 야만 상태에 빠지거나, 기후 파시즘이나 기후 마오쩌둥주의와 같은 독재국가에 살아야만 한다.


물론 이런 급진적인 결론이 나오게 된 나름의 논증이 있다. 어중간한 대책으로는 현재의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린 뉴딜과 같은 녹생 성장 담론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러한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욱 키울 것이라고 고헤이는 지적한다. 이른바 제번스의 역설(Jevons paradox)라 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로 에너지나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지만 그만큼 비용이 저렴해져 자원과 에너지를 오히려 더 소비하게 된다. 실제로 전세계 재생에너지가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에 대한 전체 수요가 증가하니 화석연료 소비량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녹색 성장이 해결책이 아닌 또 다른 이유는 이미 늦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의 임계점이라 여겨지는 1.5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선 2030년에는 이산회탄소 배출량을 2010년의 절반으로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면 이 목표의 실현가능성은 낮아진다. 재생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데다, 상당한 규모의 재생 에너지 시설을 갖추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마당에, 성장을 지속한다면 경제 활동 규모는 유지되거나 커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긴 힘들어진다.



성장과 이산화탄소 배출이 서로 충분한 절대적 디커플링을 이뤄야 하지만, 현 상황의 지속은 상대적 디커플링 혹은 그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67쪽.



경제 성장과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면, 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바로 '탈성장'의 요지다. 그리고 고헤이가 보기에 탈성장을 목표로 한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적합하지 않다.



구세대 탈성장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외부하거나 전가하지 말자, 자원을 수탈하지 말자, 기업의 이익보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행복을 우선하자, 시장 규모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하자. 이런 주장은 분명히 간편한 '탈성장 자본주의'다. 이 주장의 문제는 이윤 추구도, 시장 확대도, 외부화도, 전가도, 노동자와 자연을 수탈하는 것도, 전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사실이다. 그 본질을 전부 그만두고 감속하라는 말은 사실상 자본주의를 때려치우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33쪽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자본주의 문제임과 동시에 국가의 실패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시각과 거의 동일하게 자본주의가 만드는 문제에 국가가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평가한다. (마르크스 또한 국가를 자본주의 지배의 유지를 위한 상부구조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각국의 대응 방식을 보면, 기후 위기 상황에서도 국가기구는 최종적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결국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코뮤니즘(Communism)이다. 고헤이가 주장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정치체제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을 통한 공동 관리, 자주 관리에 가까워 보인다. 번역하자면 '연합' 혹은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을텐데 어소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신할 수 있을지, 국가를 대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논의하지 않는다. 다만 어소시에이션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하기에, 생산 과정도 느려 경제 활동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박한 반면,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다.



탈성장은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구분이 중요해진다. 사용가치가 상품이 본래 가지는 쓸모라면, 가치는 상품이 시장에서 평가된 가격에 가깝다. (다른 곳에는 가치를 교환가치로 표기하기도 한다.) 쉽게 낭비되는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사용가치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적 계획에 따른 생산을 주장한다. 이는 어소시에이션으로 관리되는 분권형 사회주의 기획경제에 가까울까? 아쉽게도 이 책에는 이전의 소련의 계획경제와 탈성장 코뮤니즘은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한 고헤이의 탈성장론에는 자본주의가 가져왔다고 평가하는 혁신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이를 시장을 통해 보상 받는다. 그런데 탈성장 코뮤니즘에서의 기술 발전과 생산성 혁신은 어떻게 가능할까? 혹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기술의 발전은 원래 시장과 무관했고, 교환가치만을 우선시하는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의 수탈을 더 강화한다고 보아야 할까? 여전히 '혁신'을 이유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신뢰하는 이들에겐 탈성장 체제 내에서도 기술 발전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과학을 버릴 것이냐 버리지 않을 것이냐 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무의미할 뿐이다. 앞으로 재생에너지와 정보통신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중략) '열린 기술'이란 '커뮤니케이션, 협업, 타자와의 교류를 증진하는' 기술이다. 그에 비해 '닫힌 기술'은 사람들을 분단시키고 '이용자를 노예화하며' '생산물 및 서비스 공급을 독점하는' 기술을 가리킨다. 226,227쪽



그리고 위 문단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다. 고헤이가 하고 싶은 말이 기술에는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이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술 그 자체보다는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서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작가의 의도가 전자였다면 기술에 대한 과도한 목적론적 해석이 있고, 후자였다면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대표적인 예로 원자력 발전은 민주적으로 관리하기 여렵기에 중앙집권적인 햐향식 정치 형태와 긴밀히 연결되는 닫힌 기술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현재 열린 기술에 가까운 인터넷은 국가가 중심이 되어 개발한 닫힌 프로젝트였다. 원자력 발전이 그 자체로 닫힌 기술이라기보다, 그 기술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닫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과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경계하자면서도 기술은 이분법으로 나누는 방식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고헤이의 탈성장론은 '이만해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언뜻 소박했던 옛날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지금의 번영을 나누기만 해도 충분한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것이다. '이만해도 정말 충분할까?' 나는 아직 이 질문을 답하기 어렵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의 마르크스는 생태주의의 옷을 입은 새로운 모습이지만, 그가 서 있는 배경은 산업사회에 머물러 있는 인상이었다.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정보화사회로, 금융자본주의로 나아간 현대 자본주의의 진화는 이 책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최악에 다다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던 것처럼, 언젠가 기후위기가 닥칠 것이며 '탈성장 코뮤니즘'이 일어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이 재현될 뿐이다.


읽고 나면 좀더 명쾌해 질 줄 알았는데 되레 생각할 거리가 늘어났다. 다음에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관계를 다룬 책을 살펴봐야겠다.





읽은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사이토 고헤이, 다다서재, 2021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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