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찾기
나라는 작은 존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큰 구조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분투할 것. 구체제를 전복하고 신체제를 세울 명분도, 의지도, 힘도 없기에 지금의 테두리 안에서 안락한 요새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명상과 요가를 하며 비움을 실천하면서도 동시에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까닭이다. - <자본주의 키즈의 반자본주의적 분투기>, 이혜미
이 문장만큼 요즘의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 구절이 있을까. 누군가는 이 문장에서 위로를 얻고, 누군가는 이 문장에서 방향성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현실적이서, 너무나 현실적이서 암담해졌다. 천성이 이상이 없으면 힘겨워서인지 몰라도, 명분과 의지, 꿈과 희망이 없는 일상은 일분일초가 버겁다. '그저 나'로 남기보다는 '더 나은 우리', 그리고 '그 속에 나'가 되기를 바라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 역시 이상이 이끄는 방향대로 살려고 나름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그저 나'로 살아온 사람 아니었나? '도무지 어쩔 수 없는 큰 구조' 속의 한 개인으로, 일상 속에서 나름의 분투를 해왔다고 자부(해야)하는 사람 아닌가?
이런 막막함의 순환 구조를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말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11~12쪽)을 뜻한다. 그렇다. 자본주의 키즈는 반자본주의적으로 분투할지언정, 자본주의의 대안을 상상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설정에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그대로 체현된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게임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이 게임 외에는 남은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오징어게임은 '자본주의 사회의 강력한 축소판'처럼 보인다. 세계 어느 곳보다 자본주의가 '리얼'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드라마가 나온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감히 자본주의 그 너머를 상상한다고?
오랜 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대안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하지만 1990년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하고 난 뒤로 사회주의는 더 이상 대안이지 못했다. 오히려 뒤처진 것,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반면에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지난 30년간 더욱 강해졌다.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이든 아니든 간에 경제는 '자본주의'여야 했다. 문제는 '천박한' 자본주의이지, 자본주의 그 자체는 아니고, 자본주의는 버릴 것이 아니라 고쳐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9년에 찾아온 변화는 이 상식에 균열을 내었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는 물론, 인류 문명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너무 당연해서 묻지 않았던 일상의 시스템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돈키호테로만 여겨지던 비판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인간이 주도권을 잡았던 이전의 정상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금의 상태를 '뉴 노멀 new normal'이라 부르고 있다.
인식(recognition)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과거의 무언가, 즉 모름에서 앎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과거의 의식을 상기시키는 그 단어의 첫 번째 음절(re)이다. 요컨대 우리 앞에서 과거의 의식이 번쩍 살아나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즉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 바로 그때가 인식의 순간이다. -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13쪽
우리의 시스템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2019년, 그리고 이 이후의 상황은 시스템의 부분적인 고장일까, 아니면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한 문제일까? 자본주의의 대안은 필요할까? 그렇다면 그 대안은 사회주의일까? 최근 이런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다행히 먼저 질문을 던지고 힘껏 상상하고 준비한 연구자들이 세상엔 아직 많은 것 같다. 그들의 생각을 좇으면서 탐험을 시작해보려 한다.
읽은 책
자본주의 키즈의 반자본주의적 분투기, 이혜미, 글항아리, 2021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리시올, 2018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에코리브르, 2021
글. 김소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