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세탁합니다.

그렇게 한 시절을 빨아버렸네, 말끔히

by 쓰는 사람 지민

비닐 가방에 빨랫감을 주섬주섬 담아 세탁방에 가는 길,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이번 달에는 주기가 유난히 늘어졌고, 어지럼증과 통증도 평소보다 심했다. 영어 시험을 치르느라 이미 에너지를 한참 소진한 터라 얼른 빨래를 끝내고 돌아가 편하게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름옷이니 찬물 모드로 야무지게 돌려두고 마트에 가기 위해 나섰다. 뒤에서 울려오던 쿵쿵거림. 그 소리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왜 그때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세탁이 끝날 무렵, 다시 세탁방으로 가려했을 때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테이블 위에 두고 왔나? 순간 스치는 생각에 아차, 머리가 질끈 조여왔다. 그때서야 빨래 가방에 핸드폰을 넣어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빨랫감을 통째로 세탁기에 부어 돌려버렸다는 것도.

전원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듯 미약하게 깜빡이던 나의 아이폰은 끝내 영원히 멈춰버렸다. 전원이 켜져야 데이터를 옮길 수 있는데 그 상태로는 유심도 SD카드도 복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4년 넘게 사용했던 기기여서 곧 새 핸드폰을 장만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새 기기의 텅 빈 갤러리와 연락처 목록을 바라보며 얼마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황스러웠고 허무하기까지 했지만 그 상황을 나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찬찬히 다시 인증서와 앱을 내려받고 은행 업무와 관련된 것들도 차례로 정비했다.


다행히 카카오톡은 일부 대화창과 친구 목록이 남아 있었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상황을 알리자 지인들이 연락처를 보내왔다. 하나같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슨 큰일이냐며 걱정했지만—솔직히 말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한 달에 한번, 그날이 되면 아프고 어지러운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영어 시험 준비에 머리를 오래 써서 몸이 버티기 힘들었던 것도 맞다. 그래도 고작 그런 이유들로 이렇게까지 혼이 나가나 싶었다.






리셋이네.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네.

빨래를 하려다 내 지난 시간의 기억들까지 깨끗이 빨아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눌러버린 것만 같았다. 지난 핸드폰을 4년 동안 썼지만 그 안의 유심에는 십수 년간 차곡차곡 쌓인 데이터들이 담겨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비워냈어야 했던 얼룩지고 해진 자국들이 한순간 말끔히 지워졌다.

생각해 보면, 절대 없어지면 안 될 사진이나 영상은 없었다. 진작에 끝낸 인연들도 많았는데 여전히 가지고 있는 연락처들도 많았다. 그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강제적인 방식으로 한 번에 잘려나가서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그 안에 어떤 섭리와 흐름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나니 생각보다 마음은 괜찮았다. 앞으로는 계속 함께할 사람들의 연락처로 전화 목록을 채워나갈 것이고 갤러리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정화되고 진화된 시선으로 바라본 이미지들만 저장해 나갈 것이다. 작은 인사이트들, 문득 깨달았던 바를 끄적여놓은 메모들은 못내 아쉽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떠오를 거라 믿는다. 이제 그만, 십수 년을 함께해 온 그 데이터들은 내 기억 속에서만 조용히 재생하려 한다.


휴... 그런데 왜 이렇게 후련하지.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