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투스의 보편적 설계: 다시 특수교육을 꿈꾸다.

by 쓰는 사람 지민



독일에서의 여정은 단순히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이 도시가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도시 곳곳에 녹아든 ‘설계의 철학’을 읽어내고 그 묵직한 울림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작동하는 설계, 기능하지 않는 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저상 버스와 트램이 정차하는 장면이었다. 문이 열리자 도로와 트램의 바닥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한 수평을 이뤘다. 휠체어와 유모차가 어떠한 덜컹거림도 없이 물 흐르듯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독일은 단순히 유니버설 디자인을 ‘갖추는 데’ 멈추지 않고 일상 속에서 ‘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도 저상버스가 있고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용어 역시 통용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인도와 멀찍이 떨어져 정차하는 버스, 점자 블록을 가로막은 오토바이, 고장 난 채 방치된 장애인 화장실….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이 설계들은 우리 사회에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진정한 합의가 부재함을 방증한다. 이는 장애인이나 약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시민적 과제라는 자각이 결여된 탓일 것이다. 기능하지 않는 제도는 기만에 가깝다. 내가 독일의 거리에서 본 것은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설계의 철학이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된 모습이었다.



아비투스, 사유재에서 공공재로

길 위의 유니버설 디자인보다 더 깊은 충격을 준 것은 교육 시스템에 녹아든 ‘접근 가능성’과 ‘보편성’이었다. 국공립 대학의 무상 교육, 누구에게나 열린 예술 교육, 그리고 유서 깊은 명문대에 당당히 자리 잡은 특수교육학과의 위상은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웠다. 예비 교사들이 거쳐야 하는 엄격한 석사 과정과 방대한 실습 시스템을 살펴보며 독일에서는 교육이라는 문화 자본이 특정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자원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이 정규 교육이나 취향, 교양 등의 형태로 축적되어 계급을 재생산하는 ‘아비투스(Habitus)’가 된다고 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취향은 곧 계급의 경계를 만드는 기제다. 하지만 독일 사회는 이 아비투스를 사적 영역에서 공공의 장으로 끌어내었다. 이곳에서 아비투스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반이자 공통 언어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아비투스는 여전히 ‘차별화 전략’이다. 문화 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축적되며 이는 철저히 집단 내부에서만 통용된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회자되곤 하지만 그 바깥에 선 이들에게는 엄연한 경계가 존재한다. 독일은 Barrierefreiheit 철학을 통해 물리적 장벽뿐 아니라 문화적 위계라는 아비투스의 장벽까지 허무는, 그야말로 사회 전체의 ‘보편적 설계’를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의 문화 자본은 스스로의 경계를 공고히 하여 구별 짓기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교육 현장 역시 마찬가지다. 배움은 보편의 권리라고 하지만 특히 예술 교육과 같은 문화 자본의 축적은 여전히 제한된 경로로만 유통되며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



보편적 설계로서의 특수교육을 꿈꾸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 특수교육대상학생들에게 문화와 예술은 어떤 형태로 제공되고 있는가. 한국의 특수교육은 종종 보편적 권리가 아닌 경계 밖의 아이들에게 베푸는 ‘특별한 시혜’나 ‘예외적 처우’로 오해되곤 한다.

특수교사에게 씌워지는 ‘좋은 사람’이라는 수사 역시 겉보기에 긍정적이나 실상은 교사가 감당해야 할 고강도의 감정 노동과 윤리적 부담을 ‘개인의 선의’나 ‘사명감’으로 포장하여 미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교육적 전문성보다는 개인의 도덕성을 먼저 요구받는 구조 속에서는 장애 학생 역시 교육의 본질인 보편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예외적인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반면 독일의 특수교육은 ‘특별함’을 위한 별채가 아니라 교육 전반을 구성하는 ‘예외 없는 설계’의 필수적인 기둥이다. 이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단단한 철학처럼 보였다.



아비투스의 보편적 설계

나는 공공과 사유의 영역을 넘나들며 문화자본을 충분히 누린 수혜자다. 나의 성취이기 이전에 사회가 허락한 조건이자 자원으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교육적 토양은 충분히 비옥했다. 그래서 교단에 선 후, 나는 내가 누린 아비투스를 학생들에게 온전히 흘려보내고자 노력했다. 내가 경험한 질문과 사유의 세계를 아이들도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믿었다. 내게 문화예술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생존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업 안에 예술의 언어를 녹여내는 일은 나의 교육 철학을 실천하는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 과정이 때로 고단하고 버거웠을지라도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아비투스를 형성해주겠다는 의지가 나를 지탱해주었다.


장애 학생이라고 해서 지식이나 규범, 사회적 맥락에서 예외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기준이나 기대도 낮추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은 여전히 단호하다. 나의 교실은 특수 학생과 일반 학생,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것이 교사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이 일을 계속 이어갈 이유다.

독일에서 돌아온 나는 긴 질문을 품게 되었다. ‘대한민국 공교육’이라는 척박한 토양에서 나는 어떤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교육 자본은 어디로 흘러야 의미가 있을까.


‘아비투스의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 of Habitus)’


이 개념은 이제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지금부터 한국 교육에서 내가 풀어야 할 실제적 과제가 되었다.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는 설계, 그 단단한 보편성을 향한 실천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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