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찌리릿!

나는야 소중한 이웃을 지키는, 스파이더맨!

by 박정오

1시 17분.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온 신경을 집중한다. 머릿속엔 온갖 상황과 경우의 수가 펼쳐진다. 다시금 시각을 확인한다. 1분이 더 지나 1시 18분. 나를 향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얼른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야만 한다. 그들의 신뢰를 잃을 순 없다. 더욱 집중한다. 편집자 찌리릿이 발동하려 한다. 감이 온다. 마치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나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1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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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광안리 앞 공간으로 옮긴 후, 이 전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공간 안쪽에는 사무실이 있었고, 홀은 카페 및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편안하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타와 피아노도 있었다. 거기다 서점도 함께 운영 중이라 홀 한쪽에는 새 책들이 가득했다. 놀고 즐길 거리가 많았다. 무엇보다 손님이 없었다. 손님이 오지 않는 복합문화공간. 그곳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겐 최고의 놀이터인 셈이다.

사무실과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날이면,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다. 기껏해야 10~20분 정도였지만,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무직에겐 그 짧은 시간마저 소중하게 다가왔다. 회사 대표님과 공간 대표님은 외부 일정이 많아 함께 점심을 먹는 경우가 잘 없었다. 자연스레 회사 디자이너 선배님과 공간 매니저 형, 그리고 나까지 세 명에서 자주 점심을 먹곤 했다. 29살과 30살, 31살. 우선 또래였다. 비슷한 대표님 밑에서 고생하는 비슷한 환경, 비슷한 불만. 무엇보다 일하기 싫어하는 비슷한 욕구. 하는 일도, 성격도, 취향도 모두 달랐지만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런대로 조합이 맞았다. 케미가 가장 터지는 순간은 단연, 점심시간이 넘어서까지 홀에서 땡땡이를 치며 놀 때였다.

매니저 형과 내가 번갈아 가며 기타를 연주한다. 노래를 부른다. 디자이너 선배님은 처음엔 구경만 하다가, 기타에 흥미가 생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두 명 모두 제각자 가르쳐주려고 하니 뭔가 어긋난다.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는 매니저 형과, 기타는 일단 멋있게 치고 봐야 한다는 나의 교육철학이 극명하게 나뉜다. 아, 진짜 저랑 안 맞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느 날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한 곡만 죽어라 연습하던 선배님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는 악보도 볼 줄 모르지만, 늘 연주하는 곡만 통으로 외워 이따금 연주했다. 똑같은 노래 좀 그만 연주하라며, 매니저 형이 핀잔을 준다. 기타는 제법 치지만, 피아노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매니저 형을 보니, 분명 피아노는 젬병이란 확신이 들었다. 기타와 피아노가 지겨워질 때면, 빙고를 하곤 했다. 언젠가 아이돌 가수로 빙고를 했는데, GOD나 HOT, 터보, 코요테 등 옛날 아이돌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나마 트와이스나 방탄소년단 말고는 요즘 아이돌을 다들 잘 모르는 거 같다. 역시나 비슷한 세대다. 물론 이 중에 내가 가장 어리지만!

홀에선 놀 때 가장 중요한 게 있다. 정신 없이 놀다 보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날 때가 많았다. 1시가 되면 땡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건 영 재미가 없다. 그보단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까지 실컷 놀다가도, 대표님이 들어올 때쯤 사무실로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 게 훨씬 스릴이 넘쳤다.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으니 일석이조였다. 즉 대표님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필요가 있었다.

새 보금자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세 명에서 실컷 놀고 있다가 대표님이 불쑥 사무실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열심히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었는데, 대표님의 갑작스런 등장에 화들짝 놀라 그만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날의 치욕을 되새기며,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평소 사무실에 들어오는 시간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외부 일정이 있을 때, 밥을 혼자 먹고 들어온다고 할 때, 집에서 출발했을 때 등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날씨와 요일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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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날과 다름없이 홀에서 놀다가, 시각을 확인했다. 1시 22분. 점심시간이 22분이나 오버되었다. 10분쯤 더 앉아 있다가 사무실에 들어가도 괜찮았지만, 왠지 감이 안 좋았다. 5분 내로 대표님이 사무실에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둘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자리에서 빠져나와 사무실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으니, 정확히 2분 뒤 대표님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두 명은 홀에서 놀고 있는데 나 혼자 일하고 있으니, 일이 많거나 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가 싶어 대표님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혼자 일하고 있냐고. 나는 점심시간이 다 끝나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모를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별일 없다고 덧붙였다. 다른 사람과 달리 홀로 묵묵히 일하는, 바람직한 직장인으로 비치는 순간이었다. 사기극이 이토록 훈훈하게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갑자기 디자이너 선배님이 급하게 들어왔다. 이내 조금 전의 상황을 대표님께 이실직고했다. 아...

이 사건 이후로 매니저 형과 디자이너 선배님의 신뢰가 쌓였다. 점심시간, 홀에서 놀다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싶으면, 대표님이 사무실에 오는 시간을 나에게 묻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능력을 발동했다. 편집자 찌리릿! 오늘은 대표님이 언제 들어오는지, 치열한 분석과 동물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정확한 시각을 예상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뒤따랐다. 나만을 바라보고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명에게 실망감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이게 바로 히어로들의 사명감일까. 높디높은 뉴욕 빌딩을 거미줄 하나만을 의지한 채 훨훨 날아다니는 초능력자. 악당을 물리치고 시민들을 구하는, 빨간 쫄쫄이를 입은 한 히어로의 마음이 이제야 공감이 갔다. 나는야 디자이너 선배님과 공간 매니저 형을 지키는,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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