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밴드 2를 보며
- 슈퍼밴드 2 경연대회 하네. 너도 한 번 나가보지 그래?
- 내가? 이 나이에?
- 나이 제한이 있나?
- 그런 걸 왜 해?
- 뭔가 준비하고 도전하는 그 과정이 짜릿하면서도 흥분되잖아.
-.......
큰아들과 점심을 먹는 중 TV에서 슈퍼밴드 2에 대한 광고가 나오길래 슬쩍 이야기를 흘려봤다. 아들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산울림, 송골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이치현과 벗님들, 옥슨 80, 활주로, 로커스트, 건아들 등의 그룹사운드의 음악을 들으며 청춘의 감성을 키웠다. 7,80년대는 '그룹사운드'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2천 년대 이후부터는 '밴드'란 말로 대체되면서 '그룹사운드' 용어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는 옛말이 되어 버린 '그룹사운드'가 훨씬 친근하고 허물이 없다. 이는 길들여지지 않은 내 젊은 날들이 깊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온전히 나의 성장을 도와준 음악프로이다. 날마다 그룹사운드의 노래를 들으며 늦은 밤까지 잠 못 이뤄하던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 그때는 왜 그렇게 흔들리고 비틀거렸는지. 정치적 이념, 데모, 선배들과의 논쟁, 자유, 시험, 취업, 이성 등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선택'하지 못하는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침체되고, 숨어버리고, 우울했던, 건조하고도 푸석푸석한 청춘이었다. 비틀거리는 청춘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준 건 노래였다. 그룹사운드의 노래는 침체된 눈물을 쏟아내게 했고, 우울한 마음에 색칠을 해 주고, 숨은 마음에 용기를 주기도 했다. 어딜 가든 음악이 따라다녔고, 난 음악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때의 감정들이 삭히고 발효되는 과정을 지나면서 지금의 글쟁이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곳곳에 묻혀있다가 어느 작은 단서 하나에도 되살아는 그 시절의 감성.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그룹사운드의 청춘에 나도 함께 소리치며 열광하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어쩌면 아들에게서 그때의 숨결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실용음악에서 베이스 기타를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를 결성하여 크고 작은 무대에서 공연을 해 왔다. 남편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을 말렸지만 나는 적극 밀었다. 그 이유는 첫째, 아들이 하고 싶어 하고 잘하는 것이니까. 둘째, 아들이 행복해하니까. 셋째, 내가 좋아하니까.
이 세 가지를 들이대며 남편을 말렸고, 결국 아들은 베이시스트가 되었다. 나는 아들이 공연하는 곳마다 쫓아가 나의 10대처럼, 20대처럼 응원하고 열광해주었다. 그런데 점점 공연 무대가 줄어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밴드의 구성원들이 하나 둘 나가게 됨으로 나의 열광도 아쉽게 끝이 나 버렸다. 아들의 친구들은 거의 생활 전선으로 잠식해버렸고, 아들 혼자만 지금까지 음악의 길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는 아들이 만드는 새로운 음악에 청취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밴드의 역동성과 열광의 하나 됨의 에너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꿈틀거린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아들은 시큰둥한 얼굴이다. 저 시큰둥한 얼굴이 무대에 다시 서면 번뜩거리는 눈으로, 팔딱거리는 생명의 몸으로 에너지를 뿜어낼 텐데...
그때가 네가 가장 멋있어 보인단다, 아들!
어쩌겠나. 30대가 된 아들이 자신도 늙었다고 하니 슈퍼밴드에 출연한 젊은 청춘들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하기야 요즘 젊은이들의 연주와 노래는 상상 이상의 창의성과 독창성,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당치 못할 때가 있다. 아들 역시 격세지감, 그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래도 음악 역시 시대성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 시대를 사는 나는 그들의 음악에 충분히 공감해줘야 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들의 음악을 나의 청춘의 음악처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슈퍼밴드 2 경연은 시작되었고,
아, 저들의 천재성에 나는 블랙홀 안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간다.